조부님 (139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윗대 우리 할아버지들께서는 이조시대에는 주로 삼남지방에 터전을 잡고 계셨던 것으로 묘역(墓域) 추적 결과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전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4, 15, 16세손 할아버님들은 임진왜란 때는 진양(晉陽) 북쪽 산청지방에 계셨고, 병자호란 때 17, 18세손은 경남 진해 쪽으로 남하, 일시 이주하였다. 

그 후 다시 산청(山淸)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보인다. 19세손, 즉 8대조 때 잠시 고성(固城)으로 오셔서 거주하다가 20세손(7대조) 때에 광양으로 옮겨 정착을 하게 된다. 1700년대에 들어와 ‘홍경래 난’과, 조선 전국에 민란이 발생하고 1880년 호남, 충청지역에 영향을 끼친 동학운동과 청일전쟁의 혼란기에는 순천, 광양, 진상의 지리산 남쪽 남해지역에 조용히 정착하여 생활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 중기, 말기에서는 우리 윗대 할아버지들의 먼 지역 이동이 거의 없었다. 현재까지 순천, 광양, 진상 등 한반도의 아열대 기후인 이 지역에 조용히 정착하여 살고 있다. 

항렬표(行列表) 

ㄱ. 영돈령공(준)파(嶺敦寧公(遵)派)

 世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항렬  정  계  형  기  석  영  빈  병  균  종  문  동  현  중  련  홍
 行列  廷  季  炯  基  錫  永  彬  炳  均  鍾  汶  東  炫  重  鍊  洪

ㄴ. 돈령공 취구파(敦寧公 就九派) 

 世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항렬  재  하  상  주  진  한  병  경  동  현  성
 行列  載  夏  商  周  秦  漢  炳  庚  東  炫  聖

조부님(字 : 瑞任. 商義)의 소년시절

조부님 서임(瑞任)은 몇 편의 드라마로 엮을 만큼 많은 시련과 도전을 가진 극적인 인생을 사셨다. 마침내 그 극적인 인생은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의 신화를 이루어냈다. 근검절약의 생활기조는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고 게으름, 나태를 가장 증오하셨다.

할아버지의 ‘자조(自助)를 못한 놈은...’, ‘...협동도 못한다.’는 말씀을 우리들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근엄주의, 「소토익」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대의를 위한 지출, 예를 들면 육영, 공익사업 등은 항상 앞장을 서셨다. 여기에 우리 가문의 선구이신 상의(商義) 할아버지의 역사를 풀어볼까 한다.

조부께서는 열강의 각축이 한반도를 휩쓸고, 노쇠한 은둔의 왕조가 내란에 휘말리는 격변의 시대, 1873년 2월 21일 진상면 지계리(津上面 智溪里) 백운산 어귀에서 태어나셨다. 매천(梅泉) 선생이 구례로 나들이하시거나 한양 길에 오르실 때 지나던 길목 지계리는 첩첩산중이다. 광양, 구례와 하동읍의 3개 군(郡)이 만나는 삼각점에 해당하며, 신작로 찻길이 생기기 전에는 인마, 유통의 교통로이기도 했다. 

조부님은 다랑논 몇 마지기로 생계를 겨우 유지하던 증조부 성하(性夏 : 字 군중(君仲)) 할아버지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노산(老産)임에도 기골이 장대하고, 역발산의 힘과 기개를 가지신 분이셨다. 큰댁 앞 놀이터 조산에는 「들돌(石)이」 라는 것이 있었다. 조부님 젊을 때 힘을 겨루기 위한 역기 같은 기능의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놀이로, 허리에 힘을 주고 깍지 낀 손으로 돌을 들어 올려 어깨 너머로 넘기는 놀이이다. 이 무거운 돌을 조부님 출생지에서 30리(里) 거리의 새 터전인 지랑(旨郞) 마을까지 지게로 단숨에 져다 놓으셨다고 우리들에게 자주 자랑하시는 이야기거리였다.
 
▲ 조부님, 長孫 결혼식날

조부님의 말씀은 좀 과장된 면도 없지 않으셨다. 당신께서 겨울날 아랫목에 깔고 앉으신 표범모피 방석과 앞뒤에 덧댄 모피 조끼는 항상 당신의 용맹과 힘의 상징으로 자랑거리였다. 직접 창으로 찔러 잡은 것이라 주장하시는데, 작은 아버지 한 분이 나에게 바른말이라고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아마도 파 놓은 함정이나 덫에 걸린 범을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때려잡은 것일 게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나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힘이 장사였고, 고함소리도 우렁차 우리집 안산에서 무단으로 나무하는 사람에게 질러대는 고함소리는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곤 했다. 지게를 들고 뛰어 도망가는 불법침입자의 모습은 자주 목격하는 광경이었다. 이런 무력 앞에 할아버지의 돈을 떼어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윗 형제분으로 상환(商煥 : 字 瑞允, 1862년생), 상유(商裕 : 字 瑞員, 1865년생), 상록(商祿 : 字 瑞亨, 號 石園, 1869년생)과 우리 할아버지 사형제는 모두 우애가 있었다. 첫째는 얼마 되지 않는 농토를 일구고 둘째인 상유(商裕)가 보조 농사꾼이고, 셋째는 인물도 좋고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해 아들 하나는 글을 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일찍부터 사역(使役)을 면제 받았다.

막내인 상의(商義)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형님들의 심부름과 깔담사리 역할을 하며 자랐고, 잉여 노동력이다 보니 자연히 외부로 나돌기 시작했다. 벌써 15, 16세 때부터 이웃집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도우며 17세 때에는 중머슴의 새경을 받을 정도로 노동력과 생산성을 인정받았다. 새경의 협상은 반드시 큰 형님인 상환(商煥)이 했고, 추수가 끝날 무렵 노동의 대가를 받아오는 것도 큰 형님의 몫이었다. 우리 조부님은 한 푼도 만져본 일이 없었다 한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형님이 몸도 불편하고 예년과 달리 챙기는 것 같지 않고 해서 어머니께 살짝 보고하고, 당신이 직접 받아 돈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이 돈을 들고 하동 장으로 가는 앞산 열두 모롱이를 단숨에 뛰어 넘어 장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돈벌이가 없는가, 기웃거리다가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는 엿도가에 들르게 되었다. 돈을 털어 엿을 사서, 겨울철이라 시간도 많고 하여 걸어서 악양 장에 가서 중간 도매하고, 다음날 새벽같이 진교 장에 가서 중간 도매 그리고 소매를 하니 딱 3배가 남더라는 것이다. 장사란 이런 묘미가 있구나 탄복을 했다.

지금까지 당신이 돈을 만져 본 것은 겨울철 농사일이 없을 때 앞산에서 나무 한 짐 더 해서 섬진강 나루로 지고 가 팔면 엽전 서너 잎을 받는다. 어머니께 갖다 드리고 이것이 착실하게 모아져 송아지를 사서 배내기 하는 길이 부(富)를 마련하는 유일한 길로 생각했다. 그런데 단숨에 자고 나면 배(倍)가 되는 기적 같은 유통 그리고 나아가 금융(돈놀이)에 눈을 뜨면서 인생관이 확 달라졌다.

당시 시장은 의, 식, 주 그리고 제수(祭需) 물품 위주의 내용에서 잡화라는 신제품(주로 일본 제품)이 추가되면서 시장이 나날이 화려해지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축제의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바깥 세계의 새로운 정보를 얻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조부님은 돈이 생기기만 하면 산판(山坂)을 사고, 농지를 구입해 소작을 주었다. 그리고 당신의 주장은 ‘한 밑천 마련하려면 장가들기 전 총각 때 이루는 것이지, 자식새끼 생기기 시작하면 절대 돈 모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큰 댁 장형(長兄)이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래채 신방 댓돌에 놓인 신발 두 켤레를 할아버지가 보시더니 ‘이놈아, 신발짝 네 개 때 돈 모으는 것이다!’ 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을 들은 바 있다. 안에 있던 신랑신부가 문을 열고 좁은 툇마루에 납작 엎드려 ‘예, 예.’ 하던 모습을 우리들은 멀치감치서 지켜보고 낄낄대고 웃었던 일이 기억난다.

할아버님도 한 밑천 잡기 위해, 결혼이 당시로서는 대단히 늦었다. 할머니는 23세, 할아버지는 21세였다. 연안 차(車) 씨 양반으로 증조부님이 통영 고을살이를 했다고 해서 차(車) 씨 집안에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올드미스」였던 탓에 가난한 총각에게 시집오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처녀 총각이 일찍 잘 알고 지냈다고 한다. 

첫딸은 결혼 4~5년 후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되며, 두 분이 엄청나게 열심히 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富)의 기초를 닦는데 차(車) 씨 할머니의 부지런함이 일조를 했다고 한다.

 
  친가, 김녕(金寧) 김(金)의 내력 (138회)
  부(富)를 모으다 (1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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