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富)를 모으다 (140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결혼과 함께 분가를 했는데 달랑 쌀 한 가마와 겉보리, 쌀보리 합해서 두 가마, 그리고 종자(種子)로 콩 소두(小斗) 한 되를 얻어 나오셨다. 적은 재산이지만 산, 논, 모두 형님들의 몫이었고 밭떼기 하나 얻지를 못했다. 

그동안 당신이 벌어서 사 놓은 땅과 산으로 기본 식량은 될 정도였고, 가급적 형님들의 재산과 중복이 되지 않도록 멀찌감치에다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산중(山中)을 벗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는 넓은 평야 쪽에다 새 터전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큰 물류(物流)는 바다를 껴야 한다는 것을 일찍 알게 되어 갯물이 올라와 조그마한 범선이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을 택하다 보니 새 터전은 진상면(津上面)지랑(旨郞)마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새 터전으로 이사를 가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라의 치안이 말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여 돈이 좀 모이다 보니 걸핏하면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협박을 당하고, 수시로 돈을 뜯기곤 했다. 당시 광양현에서 「솔디재」 동쪽 4개면(옥곡, 진월, 진상, 다압면)의 치안관계는 하동 관할에 있었다. 산중인지라 의병이 들끓었다. 의병 중에는 정의로운 바른 의병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의병을 가장한 강도떼로서 수시로 약탈을 하고 매를 치고 해서 양민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밤낮 술에 취해 날뛰는 진양 폭군 ‘김가’라는 자칭 의병의 행패가 가장 심해서 하동 관아에 마을 사람들이 신고를 했다.

어느 때 하동 관아의 포졸과 일본군 헌병이 출동해 ‘김가’를 잡아 연행하려 했다. 이때 ‘김가’가 반항을 하니까 헌병이 칼을 뽑아 ‘김가’ 앞에 들이대니 김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으로 칼날을 움켜쥐자, 헌병이 사정없이 칼을 당기는 바람에 김가의 손이 피로 낭자해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신 할아버님은 기겁을 하셨고, 그때 이 산중을 하루속히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한다. 지계(智溪)마을에 대해 만정이 떨어진 것이다. 새 터 지랑 마을(일명 몰랑몰 : 몬당, 즉 언덕에 있는 마을)에 자리를 잡고, 신혼생활이 가능하도록 4칸 겹집으로 초가를 짓기 시작했다. 하동 장에서 장사를 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간을 져 날랐다. 적당한 농토로 새 집터 앞 10여 마지기(지금도 장손(長孫)이 소유하고 있음)를 사 놓고, 밭과 지금의 선산 터인 마을 뒷산을 매수해 놓았다. 

선산의 첫 수혜자는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머니(나의 증조모)였다. 당신 땅 제일 좋은 곳을 골라 어머니를 모셨으니 형님 세분 앞에 우쭐하셨다고 회고담을 말씀하셨다. 약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세 살 난 큰딸과 갓 태어난 장남(현주:鉉周 백부님)을 이끌고 새 집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당시 지랑 마을에는 양(梁) 씨와 이(李) 씨의 집성촌이고, 김녕 김(金寧 金)이 동네에 처음 입주하게 되었는데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우선 마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네 진입로를 다듬고 마을 쪽에 흐르는 도랑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을의 쉼터인 조산(造山)을 완전히 뜯어고쳐 장마, 홍수에도 끄떡없는 대피소 겸 휴식처를 조성해 놓고 할아버지의 완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들돌’을 가져다 놓으셨다. 그러면서도 하동읍 5일장에는 빠짐없이 출석하셨다. 

이제 ‘열두 모랭이’ 앞산이 아니라 더 가파르고 험한 ‘매티 재’로 무대를 옮겼다. 이 재를 넘기 위해서는 재의 초입에 있는 주막에 최소한 4~5명의 장꾼, 또는 과객이 모여야 재를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산이 험하고,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자리로 유명하다. 하동에서 진주로 넘어 가는 데는 ‘황토 재’가 있으며, 더불어 진상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매티 재’와 함께 남해안 지역에서 가장 억센 두 개의 재로 유명하다.
 
이 매티 재를 조부님은 5일마다 한 번씩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넘어야 했다. 왜냐하면 상품 유통에서 금융업으로 사업을 바꾸면서 어느 장꾼보다 먼저 섬진강 아랫나루(지금의 진월면 갈거리 앞)에 도착하여 일수(日收) 판을 벌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엽전, 은화 등을 전대에 넣어 몸에 칭칭 감고 위에는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고 산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종종 깡패, 강도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 광양군 진상의 폐 농협창고 [출처 ; 전남영상위원회]

무용담의 하나는, 어느 날 돈을 잔뜩 지니고 산을 내려가는데 두 놈이 따라오며 털려고 했나 보다. 재빨리 옆으로 피해서 높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가지고 있던 6척 길이의 탄탄한 대나무 몽둥이를 휘둘러 한 놈을 쓰러뜨리고, 또 한 놈에게 몽둥이로 찔러대니 때굴때굴 밑으로 구르면서 재빨리 몸을 피해 도망을 쳤다. 

“이놈들아, 내가 몰랑몰 김 장사다! 이놈들, 박살을 내겠다.” 일갈하고 쏜살같이 나루터로 내달렸다 한다. 안면이 있는 자들이라 사람을 시켜 화평자금을 좀 보내주고 후환이 없도록 했다고 하셨다.

일수 사업은 아주 잘 되어, 낸 돈은 거의 100%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근에 계속 살려면 할아버지 돈을 떼먹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입장하는 장꾼에게 20냥을 아침에 꿔 주면 오후 파장에 돌아오면서 22냥이 들어오고 50냥을 주면 55냥이 되니 보통 1~1.5할 장사가 되었다. 즉 두 달을 굴리면 원금의 딱 두 배가 되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신용에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나 초짜에게는 Sub Prime 이자가 적용되어 1.5~2할 정도로 매겼다 한다. 돈이 잘 벌리고 번 돈은 땅에 묻고, 집에서는 논문서 잡고, 이자 치고 해서 불과 4~5년 만에 백석지기가 넘는 재산가가 되었고, 지랑 마을 인근에 있는 땅과 산판을 모조리 살 수 있게 되어 신흥 부자의 반열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랑 마을 샛터에 이사를 내려와서도 몇 차례 의병, 강도의 습격은 있었다. 부가 축적되면서 이들과 거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땅을 사고 남은 주화는 부지런히 숨겨야 하는 처지였다. 

어느 날 의병이라는 강도떼가 대낮에 달려들었다. 분대장급으로 보이는 자가 총부리(조총으로 총신이 아주 가늘다)를 겨누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데 “다 주고 없다” 라고 응수하니 총구로 눈을 푹 찌르는 바람에 눈에 불이 번쩍하면서 안구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부엌 앞이어서 돼지 주는 기명물에 얼굴을 담그고 손으로 안구를 밀어 넣는 척 촌극이 벌어졌다. 마침 대장이라는 자가 들어와 ‘아니다. 김 진사는 손대지 마라!’ 중재를 하는 바람에 살아났고, 평소에 상납한 효과를 보았다.

김녕 김(金寧 金) 한 집으로는 못내 외롭고 세(勢)가 필요했던 조부님은 일가친척을 하나 둘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학자요, 관혼상제 등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줄 6촌 동생인 상묵 할아버지 가족을 이주시키고, 얼마 뒤에 할아버지 처가댁 큰 처남을 불러 정착시켰다.

그리고 자손들이 생기고 커 가면서 교육의 기회가 절실해졌다. 신식교육을 받은 선생님을 많은 급료를 주고 초청해 마을에 첫 서당(書堂)을 설립했다. 과목은 한문, 한글(언문), 일본어, 산수(算數)였다. 

수년 후 순천, 광양, 하동, 진주로 이어지는 신작로(국도)가 생기고 지랑 마을에서 약 2.5km 떨어진 면 소재지 신시(新市) 섬거(蟾居)에 4년제 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서당의 기능은 축소되었다. 내가 어릴 때 ‘애기 보는 아기씨’ 손에 이끌려 서당에 가서 ‘가갸거겨, 하나 둘 셋’ 유치원 수업을 받은 기억이 난다.

서당 훈도로 모신 조(趙) 선생님은 동학(東學)에 심취한 분으로 아주 박식했다. 소학교 때문에 서당이 폐쇄되자, 우리 아버님이 섬거우편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조(趙) 선생님은 우편배달부(집배원)로 채용되어 오래 근무했고, 홍수 때 다리에 물이 넘치면 우리를 등에 업어 잘도 건네주시곤 했다.

면내(面內)에 현대식 소학교 진상심상소학교(津上尋常小學校)가 기성(期成)될 때 할아버지는 기성회(이사회) 주요 멤버가 되셨고 가장 많은 땅을 내놓으셨다고 한다. 첫 번째 수혜자는 우리 아버님이셨다. 4년 과정을 여기서 마치고, 읍내 소학교에 유학하여 5~6학년을 거쳐 서울(京城)로 진학했다.

 
  조부님 (139회)
  가족_1 (1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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