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_2 (142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할아버지는 자수성가의 표본이었고 근검절약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도 남모르게 꾸준히 자선을 해 오셨다. 추수해서 며칠을 물방아로 쌀을 찧어 집 창고에 쌓아둘 때 큰 며느리를 불러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고 원조미(援助米)를 매년 연말에 정산했다고 한다. 

큰댁 대밭 뒤 울타리에 원조미 쌀통이 마련되어 있었다. 설 명절이 끝나고 햇보리가 나는 5월까지, 굶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원조미를 쌀통에 조금씩 담아 두었다. 1920~1930년대까지 일 년에 대충 구호미로 약 100~150석 정도가 지출되었다 한다. 당시 가용미(家用米)는 일 년에 70석 정도였다고 한다.

대충 보면 지랑마을 사람들은 거의 없고, 이웃 동네 청룡동, 대밭골 그리고 원당리 근방의 어려운 사람들이 한 되씩, 반 되씩을 가지고 가서 풀죽, 시래기죽을 끓여 연명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난해에 들어간 원조미 양을 확인하시고 며느리에게 새해의 원조미를 배정하시곤 했다 한다. 이러한 것 외에도 많은 일화를 남기셨다.

큰 며느리에게 검약의 교육을 위해 기명물(개숫물) 통에 밥풀이라도 떨어져 있을라치면 물을 전부 푸게 한 다음 남아 있는 밥풀을 샘물에 깨끗하게 씻어 부엌에 일하는 찬모 아주머니와 함께 며느리가 끝까지 다 먹도록 강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마루에서 2~30명 밥상을 받고 한참 맛있게 먹고 있을 때 마당에 들어서신 할아버지는 반드시 한마디 하신다. “이놈들아, 물로 배를 채워라!” 이 소리를 들은 우리들은 고개를 돌리고 모두 킥킥거리곤 했다. ‘눈치도 없는 우리 할배, 또 한 마디 하신다.’ 라는 우리들 어릴 때의 반응이었다.

또 재미있는 면도 많이 있었다. 여름 장마 때 머슴들을 놀게 하는 법이 없다. 새끼를 꼬거나, 덕석을 만들고, 가마니를 치게 한다. 여기서는 상머슴이 솔선수범한다. 일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끔 놀이 겸 밖으로 불러내 홍수 때 샛강으로 맑은 물을 찾아 쏟아져 들어오는 잉어를 잡아 회식을 한다. 

깔대로 숭어잡이 틀을 만들어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물이 빠지는 하구에 틀을 설치해 엄청난 양의 숭어를 잡아 염장을 해서 말리고, 머슴 상에 숭어조림이 언제나 오르는 일도 우리는 보고 자랐다. 겨울에는 최소 인원의 머슴만 남는데 가끔 매사냥을 데리고 나가 꿩사냥을 하고 명사수를 동원해서 고라니, 멧돼지를 잡아 회식을 시키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할아버님의 일생은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만큼 많은 재미나는 「스토리」 가 있었고, 우리 생활의 지표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할아버지를 한 일주일 모시고,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채록해서 책을 하나 써볼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유학 가 있던 1962년에,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쉽기 그지없다.

1988년 할아버지 25주기에 맞춰 지랑마을 주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마을 어귀 조산(造山)에 세웠다. 이 비(碑)에 할아버지의 평생의 일들이 잘 요약되어 있어 여기에 옮기고 할아버님의 역사를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 조부님 송덕비(頌德碑) 앞에서, 동생들과 함께
 
頌 德 碑 

小白山脈(소백산맥)의 精氣(정기)가 마지막 머문 靈山(영산) 白雲山(백운산)을 등에 업고 멀리 짙푸른 南海(남해)를 내려다보는 고장에서 金瑞任(김서임) 商義(상의) 翁(옹)께서는 오로지 地域社會(지역사회) 發展(발전)과 後世(후세) 敎育(교육)을 위해 平生(평생)을 바치셨습니다. 翁(옹)께서는 九十 평생을 한결같이 地域住民(지역주민)들에게 自助(자조)와 協同(협동)의 精神(정신)을 일깨워 주시고 勤儉節約(근검절약)의 길을 솔선수범하시어 잘 사는 마을로 육성하셨으며 막대한 私財(사재)를 미련 없이 털어 民族敎育(민족교육)의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우리 농촌에 希望(희망)의 등불을 밝히신 훌륭한 先覺者(선각자)이셨습니다. 商義(상의) 翁(옹)께서는 풍요한 마을 건설을 위해 우선 방천을 구축하여 대대로 내려오던 水難(수난)으로 부터 농토를 보호하는 한편 마을의 進入路(진입로)를 開設(개설)하여 流通(유통)을 원활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일찍이 농사의 能率(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造山(조산)을 다듬어서 마을사람들이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공동 휴식처도 마련하셨으며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동네의 환경 개선에도 앞장 서셨습니다. 商義(상의) 翁(옹)께서는 일제하의 어두운 시절에 우리 민족의 앞날을 약속하는 것은 오직 二世(이세)의 敎育(교육)에 있다는 信念(신념)에서 私財(사재)를 털어 書堂(서당)을 세우신데 이어 이 고을에 津上普通學校(진상보통학교)를 설립하는데도 주역을 맡으셨으며 광복(光復) 후에는 光陽郡內(광양군내)에서는 첫 번째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인 津上中學校(진상중학교)의 設立者(설립자)의 한분이 되셨습니다. 翁(옹)께서는 특별히 고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시와 一九三二年 민족대학인 현 高麗大學校(고려대학교)의 전신인 普成專門學校(보성전문학교) 재건에도 막대한 財産(재산)을 기꺼이 희사하셨습니다. 翁(옹)의 교육에 대한 신념은 당신의 子孫(자손)들에게 財産(재산)보다 敎育(교육)의 유산을 물려주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얼마나 투철하셨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商義(상의) 翁(옹)께서는 인간이 태어나 늙어 죽을 때까지 무슨 일이든 할 일을 가진 사람은 가장 幸福(행복)한 사람이라는 그분의 人生哲學(인생철학)을 몸소 實踐(실천)하셨습니다. 젊은 시절은 사회에 봉사하는데 바쁜 세월을 보내셨지만 九旬(구순)의 高齡(고령)에도 불구하고 나무심기에서 대바구니와 양산과 부채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한가하게 지내신 일이 없었으며 당신의 葬禮費用(장례비용)까지 미리 마련해 두신 뒤 이 세상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商義(상의) 翁(옹)의 고매한 인격과 평생 남기신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뜻있는 분들이 함께 오늘 이 비를 바칩니다.

一九八八 年 十月
旨郞 마을 새마을지도자 및 주민 일동
 
撰書 春堂 玄源福
謹書 丹巖 金淳華 

조부님은 해방의 격동기, 여순사건과 6 .25의 대혼란기에도 박해나 신체적인 위해를 당하지 않고 당신의 수명에 따라 92세의 고령으로 선종(善終)하셨다. 의로운 생애의 보상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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