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님의 부의 신장과 교육관_1 (144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부(富)의 신장(伸張)

백부님이 첫 번째 한 일은 변두리의 다락농토를 처분해서 교통이 좋고 비옥한 평야지대의 땅을 사는 방향으로 농토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다. 그때 마침 이웃 진월면(津月面)의 진목(眞木)에 있는 안(安)씨 집안(안봉호, 안병호 형제)에서 많은 땅을 내놓았다. 

안봉호(安奉鎬)씨는 광양 군내에서 유일한 만석(萬石) 거부로 부모 재산을 물려받아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 호의호식하면서 가산을 탕진했다. 겨울에는 강원도에 가서 수렵으로 지새고, 노획물을 마차에 바리바리 실어 종로통을 행진하는 멋쟁이였고, 여름에는 더위를 식힌다고 인삼대를 삶은 물을 얼음에 식혀 그 안에서 피서를 즐기는 호화판 인생이었다.

사치 생활에 거덜이 난 안(安)씨가 고향의 농토를 줄기차게 팔아제치자 우리 백부님은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을 골라 섬진강 가의 비옥한 농토를 하나둘 사 모으고 급기야 진월면 송금리, 대리 그리고 신구리 일대의 상토(上土)를 대부분 매입하게 되면서 땅부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유통업에 일찌감치 눈을 떠 10월부터 이듬해 2월 초까지 섬진강 하구의 갯벌에서 생산되는 김(해태:海苔)을 대량 입찰을 통해 확보하고 서울로 추진하여 남대문시장의 거간을 통해 팔아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겨울에는 주로 서울에 가 계셨고, 쌀과 김의 물주로서 세모(歲暮)의 서울 시장 시세를 좌우하게 되었다.

우리 어릴 때 기억으로 백부님이 겨울에 서울로 상경하신다고 하면 반드시 한 가지 행사가 있었다. 개소주를 내려 댓병으로 두 개를 가져가시는 일이다. 남쪽과 서울은 당시 엄청난 기온의 차이로 개소주로 겨울 건강을 확보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이때 간접 이익을 보는 측이 있었는데 개소주를 뜨고 나면 머슴들의 막걸리 잔치가 벌어진다. 

지금의 개소주는 기계로 압축하는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시루에 밤, 감, 각종 약재를 개고기와 함께 넣어 떡시루에 뭉근하게 찌면서 진액을 내리기 때문에 익은 살은 그대로 남아 막걸리 안주로는 최상의 상태가 된다. 때문에 상머슴이 가끔 장난삼아 큰 어머님께 직원(直員-백부님의 대외 명칭) 언제 서울 가시느냐고 묻기가 일쑤였다. 파티를 손꼽아 기다린 것이다.

동생들이 동경 유학을 떠나면서 백부님은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지방에서 생산되는 김에 역점을 두었으나, 일본에서는 완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두껍고 네모 반듯한 개량종 해태를 선호하여 그 김이 아니면 먹지를 아니한다. 

그래서 완도 쪽으로 구매 선을 돌려보려 하였으나 이미 일본 재벌들이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고 빈틈이 없어 포기했다. 그 대신 농산물, 특히 찹쌀과 팥 종류를 대량 수집해서 여수를 거쳐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이는 주로 일본시장에서 단팥죽(젠사이)의 원료가 되는 것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한다.

일본과의 무역과정에서 한동안은 백부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사업까지도 하실 수 밖에 없었다. 옹기장사였다. 진상면(津上面) 금리(錦梨) 끝자락에 있는 옹기가마 터는 광양 동부 4개면에 유일한 가마인데, 바로 수어천 하류 범선이 드나드는 선착장이 그곳에 있었다. 곡물을 수집해서 보관했다가 물때 따라 여수항으로 수송해야 하는데 창고가 필요했다.

옹기 가마에는 창고가 있었는데 이것을 이용하려면 옹기 사업장 전체를 사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결단을 내려 과잉 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들이고 말았다. 우리가 어릴 때 방학에 내려가면 옹기를 가마에서 꺼내는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은 「아이러니」 하기도 했다. 6.25 피난길에 조난을 당해 돌아가신 백부님 내외 그리고 셋째 아들 진욱(秦旭)이가 부산 다대포에서 운구 되어 3년간 가매장 된 곳이 바로 이 옹기터의 뒷산이다(선산에 정식으로 묘를 쓰기 전에 객지에서 사망한 분은 우선 가매장해 둔다는 지방 풍습에 따라 그렇게 했다.). 아마도 나중에 직접 쓰일 일이 있음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 같다.

‘장타’와 ‘단타’를 적절히 구사하는 프로 야구선수, 골프 프로 같은 면모를 백부님의 사업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자동차가 행길에 다니고 정기노선 버스가 운행되면서 신시(新市)는 갑자기 번화해 졌다.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국, 금융조합 그리고 학교가 들어서고 5일장이 열리게 되면서 버스 정류장, 각종 점포, 이발소 등의 수요가 생기게 되자 이들 상가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게 된다. 정류장 운영으로 버스회사 남철버스주식회사의 주주(株主)가 되었다. 농사 수입 이외의 현대적 자본투자의 방식에 참여하면서 부는 급격하게 증가해 갔다.

직관력이 대단하고, 모험과 도전에도 강했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적절히 이용해 사업에 활용했다. 예를 들면 전남도청과 강원도청을 연결시켜 삼씨(삼베를 만드는 대마의 씨)를 대량 구입해 와서 광양군내 농가에 보급해 농가도 소득을 올리고, 당신은 큰 유통 마진을 보고, 당시로서는 윈윈 작전이었다. 

추위로 인해 재배기간이 길고 산이 많은 강원도는 삼으로 일모작만을 하기 때문에 삼씨가 많이 생산되었으나 남도는 이른 봄에 삼씨를 뿌리고 모심기 전에 삼을 베어내야 하기 때문에 씨를 얻을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남도에서 삼씨를 구하는 것은 철이 되면 전쟁과 같았다. 이에 착안해서 전남도가 강원도에 공문으로 요청하게 되었다. 이를 구상해서 운용한 분이 바로 백부님이시다.

내가 어릴 때 삼씨를 실은 트럭 4~5대가 밤중에 「헤드라이트」를 키고 우리 동네에 들어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머슴들과 동네 사람들이 수십명이 횃불을 들고 하차작업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영화를 한편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신이 나기도 했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백부님은 현대식 문물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1930년대에 벌써 「라이터」 를 가지고 다니셨고, 「레밍턴 사냥총(엽총)」도 가지고 계셨다. 「오토바이」를 이용해서 하동의 은행과 순천의 조흥은행에 수시로 다니며 사업에 있어서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오토바이」에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다. 신작로를 따라 매티재를 넘어 하동으로 나들이를 많이 하셨는데 어느 날 술을 좀 하시고 재를 넘어오시다가 큰 실수를 하셨다. 급커브에서 잘못되어 낭떠러지로 굴렀는데 다행히 거대한 소나무에 걸려 생명을 구한 일이 있다. 
 
이 때문에 다음날 술과 제물을 머슴에게 지워 그 사고 장소에 가서 소나무에 고사를 지내고 돌아오셨다 한다. 이 사고로 인해 할아버님께 야단을 맞고 오토바이 타기는 완전 포기하고 주로 버스로 내왕하셨다.

일정(日政) 말기 버스의 운행이 시원치 않을 때에는 당신이 직접 일본 「이스스자동차」에 주문해서 입수한 목탄(木炭) 트럭 다목적차를 이용하셨다. 이 트럭은 사람과 약간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큰 「휠」이 달려 있어 「벨트」로 정미(精米) 기계를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락과 보리타작도 가능한 다기능 자동차였던 것이다.

이렇게 부를 축적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조부님으로부터 전권을 인계받은 후 절정기인 1935년경에는 수(收)로 환산해 약 육천 오백석까지 도달했다. 즉 만석(萬石)은 채우지 못했는데 백부님이 가끔 말씀하시기를 ‘동생, 자식들 공부’만 아니었으면 만석은 충분히 채웠을 것이라고. 만석을 채우려고 노력해 본 일도 없지마는 만석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해 본 일은 없다고 하셨다. 

천석이 넘어가면 더 이상 자기의 재산이 아니라고 하면서 경주 최씨의 종가 어른과의 만남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다.

1920년대 중반 어느 날 경부철도로 귀가하던 중 옆자리에 앉아 같이 여행하던 최씨 종가의 어른을 만나게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천석을 넘기면 그 이상의 재산은 자기 것이 아니요, 천석만 하더라도 천 가지의 걱정이 있기 마련이고, 만석이면 걱정, 근심이 만 가지가 되지 않느냐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셨다 한다. 

경주 최씨의 부(富)에 관한 철학을 강의 듣고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 어느덧 김천을 지나 대구에 도착할 즈음 두 분이 의기투합했든지 그길로 백부님은 경주 종가를 1박 2일로 방문하게 되었다 한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셨는데 최씨 종가의 가훈을 적어 오셨고, 그 중 당신이 따르고자 하는 항목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후손들의 훈계에 열심히 활용하셨다. 여기 적어 본다. 

첫째,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면학:勉學)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겸손:謙遜)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박애:博愛)
넷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禁慾)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을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검소:儉素)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보은:報恩)
 

원래 지주와 소작 간에는 많은 긴장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주는 가급적 많이 훑어 오려 하고, 소작은 무슨 이유를 대든지 소출을 은폐해서 적게 수(收)를 바치려하고 말이다. 

가렴주구란 대부분 50석, 또는 백석지기 정도의 소지주들 가운데 많았고, 원체 큰 땅을 소유한 5백석, 천석 이상이 되면 비교적 여유 있게 소작에 대한 수(收) 배당이 이루어졌다. 지역 구장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방법을 썼고, 지주와 소작이 일대일로 상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소지주들은 자기 몫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타작 때 입회하고 심지어 ‘북떼기’도 털어 3대7로 나누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대지주는 타작 때 입회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겠다. 

 
  백부님의 청년기 (143회)
  백부님의 부의 신장과 교육관_2 (145회)
  |21||22||23||24||25||26||27||28||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