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님의 부의 신장과 교육관_2 (145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나의 아버님도 청년시절 가끔 관리인을 따라 수(收)를 책정하는 모임에 참석해 보신 경험이 있으셨다. 비교적 들이 넓고 대부분의 땅이 소작으로 경작되는 경우, 수(收)를 매기는 날은 일 년 중 마을 전체의 가장 큰 축제가 된다. 소작인 전원이 동청이나 마을 구장 집에 집합해서 구장 중심으로 진행되고 지주 또는 대리인은 구장 또는 이장의 발언에 거의 의존해서 결정했다.

예를 들면 구장 왈, “우석이, 자네 쑤개논이 금년 홍수 때문에 피해가 좀 있었지. 작년에 다섯 가마인데 금년에는 네 가마 내게.”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또 “춘배, 자네는 금년 작황이 괜찮았지. 열 가마 내게, 괜찮은가?”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해 끝을 내고 덕석마당에서 회식이 시작된다. 구장과 마지막 결산을 보고 수집 날짜와 운송 방법 등을 협의한 뒤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 아주 편안하게 진행되는 방법이 대부분이고, 소작의 사망 등 유고시에는 구장, 이장이 대개 조치하고 지주 관리인에게 보고, 협의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런데 다만 산간벽촌에 산재되어 있는 세 마지기, 다섯 마지기, 즉 열 마지기 미만의 다랑논을 부치는 소작인은 지주와 직접 대면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들이 주로 장날에 직접 오거나, 또는 관리인이 순회해서 매기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들 어릴 적, 추수가 끝나고 첫서리가 내리는 초겨울에 지게에 한 가마, 달구지에 다섯 가마를 싣고 큰댁 바깥마당에 줄줄이 도착하는 소작인들을 본 일이 있다. 머슴들이 받아 계량을 하고, 착착 재워 놓기 시작하고 약 일 주일 정도, 마감 때까지 수(收)가 쌓이면 마당에 큰 볏더미가 하나 이루어지곤 했다.

이때 소작인들이 지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혹은 땅을 부치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정표로 가끔 지방특산물을 가지고 왔다. 닭 한두 마리를 지게에 걸치고 온다든지, 산에서 나는 버섯 말린 것, 도라지, 고사리 등을 선물로 가져 왔다. 우리들에게 가장 신이 나는 것은, 소작인들이 가져온 잘 생긴 장닭과 우리집 장닭의 승부를 겨루게 하는 놀이가 우리들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계량이 모두 끝나고 나면 소작인들의 그해의 의무가 종료되는 것이다. 마당 한쪽 편에 한 섬지기 거대한 가마솥을 걸고, 대구를 토막 내어 무와 함께 푹 끓여서 밥 한 덩어리와 함께 소작인들에게 대접한다.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면 마당은 왁자지껄해진다. 질펀한 사람 사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교육관(敎育觀)

백부님은 동생들의 대학 진학을 극구 반대하던 할아버님께, ‘대학에 안 가면 면장 밖에 못합니다.’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설득하시느라 애를 썼다. 전처(前妻)의 아들 둘은 그렇다 하더라도, 후처의 아들 6명은 서울에 있는 중등학교 정도는 졸업시켜 취직하는 것으로 할아버지는 굳게 마음먹고 있는 상태였다. 

이조(李朝) 말 혼란기의 관(官)의 행패 등을 경험한 조부님은 공부 많이 해서 출세시킬 생각이야 있었으나 첫째로 가산에 위협을 받을 교육비 지출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을 많이 해본 백부님으로서는 지식시대로 세상이 바뀌고 있으며,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인 당신은, 교육을 통해 급변하는 시대에 대처해야 한다는 교육철학이 확고했다. 동생들도 문제지만 줄줄이 커 가는 백부님 직계도 곧 뒤따라 교육을 시켜야 하는 처지였다. 거기에 공부를 잘해주는 동생 몇몇이 백부님의 교육에 대한 흥미를 적극적으로 자극했다.

예를 들자면 백부님 바로 아래 동생인 선주(善周-나의 부친)님은 초등학교 4년을 지방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읍내에서 5~6학년을 이수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급기야 한 군(郡)에서 한 사람 정도 입학이 될까 말까한 당대의 최고 명문, 경성고보(현재의 경기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집안의 첫 영광을 안겨준 것이다.

백부님은 물론 동생의 건강과 사기(士氣)를 위해 극진히 보살폈다. 첫째 광양읍 서교(西校)에 입학할 때에는 조랑말에 비단 댕기와 방울을 있는 대로 달고, ‘짤랑’거리며 읍내에 입성했다. 말을 끌던 하인은 ‘진상(津上) 도련님 여기 가신다!!’ 구호를 외치며 말이다. 당시 졸부로 밖에 인정받지 못한 지랑(旨郞) 김 씨는 이렇게라도 해서 세(勢)를 과시하는 것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동생의 건강을 생각해 읍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우부자(宇富者) 댁에 하숙을 시켰다. 우연치 않게 우(宇) 부자 댁에 똑똑하고 후덕하게 생긴, 아버님과 같은 학년의 딸이 하나 있었는데 2년간 그 여학생과 경쟁적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좋은 과외선생을 방학 때 가끔 초빙하면 같이 공부했다. 그러한 경쟁의 덕인지 우(宇) 여사도 당당하게 경성제 1고녀(현재의 경기여고)에 입학을 해, 광양에 전무후무한 경사가 도래하기도 했다.

다음 차례는 셋째 희주(禧周)님, 소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진상학교에 6년제가 개설되었고, 서울 양정고보(養正高普)에 진학했다. 우리 집안과 양정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궁중(宮中) 소유의 땅이 우리 지방에 많이 있었는데 엄비(嚴妃)가 양정 재단에 기금을 출연하면서 이 땅들이 학교 소유로 전환되었고, 매년 많은 수(收)가 송금되었을 때가 있었다. 이때 백부님은 양정 재단의 지역 대리인으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우리 집안에서는 재주가 있고 없고 간에 무조건 양정에 진학하는 전례가 생겼다.

희주(禧周) 숙부, 넷째 옥주(沃周), 다섯째 계주(桂周) 그리고 정주(廷周) 숙부에 이어 규주(圭周), 행주(行周), 모조리 양정 출신으로 가끔 교가(校歌), 응원가를 같이 부르면 양정 동문회가 개최되는 듯 했다. 일제 말엽, 식량 사정이 어렵고 하숙도 마땅치 않아 일곱째 범주(泛周) 삼촌만은 고향 근처의 순천중학에 진학하고 보전(普專)에 입학, 고대(高大)를 졸업했다. 여덟째, 아홉째 삼촌은 해방 후 고교에 진학했기 때문에 앞선 형님에 이어 양정을 졸업했다.

양정에 진학시키는 데는 조부님과 별 마찰이 없었다고 한다. 우선 학비에 특혜를 받았다. 여러 형제가 다니니 가족 「디스카운트」 가 있었고, 재단의 협력자로서 추가 할인을 받아 월사금이 반액이었다. 이런 혜택을 수시로 할아버지께 보고하면 서울 유학을 긍정적으로 보시게 되었다 한다.

이때 백부님은 용기를 내어 소학교 시절부터 서울에 보내는 것이 학업의 성취를 위해 보다 효과적이라 생각하고 옥주(沃周) 숙부 때부터 모조리 서울 서대문 미동소학교에 5학년 때 전학 시켜 졸업을 시켰다. 백부님 아들 진석(秦汐-우리집 장손)은 미동소학교 졸업 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상업계열이 유리하다 판단하여 동경의 간다상업(神田商業)에 일찌감치 유학시켜 졸업 후 일본대학 상과(商科)를 마치게 한다.

서울과 동경에서 동생, 조카들을 관리하는 책임은 우리 백부님의 초창기 「Hope」였던 우리 아버님이 도맡아 했다. 아버님의 하숙집 선택은 탁월했다. 경기고가 있는 주변인 인사동에 우리나라 서도(書道)의 대가 성제 김태석(惺齊 金泰錫) 선생댁을 선택했다. 가세가 점차 약해가는 선비의 댁이지만 법도와 행실이 방정(方正)해서 하숙 여건이 대단히 좋은 곳이었다.

형제분들이 모두 이집에 있으면서 사랑을 받았다. 특히 천자문(千字文) 서도(書道)를 입사(入舍)와 함께 바로 지도를 받다보니 우리 숙부님들이 하나같이 명필들이다. 붓글씨는 물론 펜글씨도 모두들 잘 쓰셨으며, 출거가두(出去街頭)에 도움이 되었다 한다. 옥주(沃周) 숙부는 붓글씨에 특히 능해 고향 조산(造山)의 큰 바위에 「九龍盤石」(구룡반석)이라는 글을 음각으로 남겨 놓으셨다(구룡이 탄생한 곳이라는 뜻으로 아홉 형제를 말한다.).

나의 아버님과 희주(禧周) 숙부는 동경제대 다음으로 사법시험에 많이 합격해서 법관양성소라는 별명을 가진 주오대학(中央大學) 예과에 진학했고, 2년 후 본과인 법학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백부님은 둘 중 하나가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주기를 바랐을 것인데,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아 실망이 컸을 것이다.

성격이 다부진 계주(桂周) 숙부가 시험 준비를 해왔는데 일본의 중국침공, 대동아전쟁 등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 후 우리나라에 인재가 극히 부족했던 시절, 일찌감치 공직에 진출하여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동경유학 시절 백부님은 동생들의 면학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환경이 좋은 지역의 학생들에게는 다소 사치스러울 정도의 하숙에 들도록 했다. 대표적인 하숙집으로 동경 간다구(神田區)에 있는 신정관(神正館)을 정했다. 고급 하숙인데 여관 체제로 운영해 매일 깨끗하게 청소가 되고 식당에서 공동 취식을 하며 면회를 위한 거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부에 방해받지 않도록 독방을 배정했고, 각 방에는 전화기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한다.

이런 훌륭한 하숙집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분은 우리 식구가 아닌, 정주(廷周) 숙부의 가까운 친우인 김치열(金致烈-전 법무장관) 선생이었다. 숙부님의 방을 방학 동안 김(金) 장관이 쓰면서 학습에 전념할 수 있어 고시에 합격했다.

모든 학비는 나의 아버님에게 집중 송금되었다. 등록비를 제외하고 공통 생활비로 월 150원 그리고 우리 아버님 몫으로 50원 별도, 합계 200원이 지급되었다. 200원이면 그때 당시 농토 200평짜리 두 마지기에 해당되는 큰돈이었다. 당시로서는 거금이었고, 현금으로 조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천석꾼 부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여유로운 유학생활로 우리 아버님들은 겨울에는 동북지방에 「스키」, 여름방학에는 남쪽 해수욕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고국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우리 어머니들은 가슴에 멍이 들어 모두 일찌감치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백부님의 부의 신장과 교육관_1 (144회)
  백부님의 동생들 관리 (1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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