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편의 글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꼭 해야 할 말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눌한 언변으로 어떤 모임이나 단체의 대표 자리를 맡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 눈에 책임을 맡기면 군소리 없이 끝까지 자기 몫의 의무를 다하는 성실함이 보였던 모양이다. 또 내성적이지만 남다른 승부근성을 갖고 있어 똑같은 조건이라도 항상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의지와 뚝심이 높이 평가받는 듯 했다.
한국 소형영화작가협회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회원들의 추천으로 협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고 원만하게 맡은 직무를 잘 수행해 나갔다. 착실하게 맡은 책임을 다 하는 모습이 주위에 좋은 인상을 남겼던지 어느 날 유현목 영화감독, 하한수 영화감독, 변인식 한국영화평론가 협회 회장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세 분은 모두 나의 영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승이자 조력자 같은 분들이다.
영문을 모른 채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로 나가니 나를 보자마자 대뜸 서울국제영화제 대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근무 중이던 명지대 업무도 바쁘거니와 아직은 내 자신이 그런 중책을 맡을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처음에는 정중히 고사했다. 하지만 ‘장찬주가 아니면 달리 적임자가 없다’는 세 분의 간곡한 요청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 해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1970년대 서울에서 처음 발족한 한국소형영화동호회는 전국적으로 매년 회원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영화 인구가 늘어나는데 비해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 줄 변변한 조직이나 정책들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던 실정이었다. 나 역시 평범한 회원으로 가입해 열심히 영화를 배우고 만들었다. 그저 영화가 좋아 시작한 활동인지라 처음에는 중요한 직책을 맡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직장인 명지대에서 내가 맡은 업무량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영화를 만들어 가다 보니 가족처럼 마음을 터놓게 지내게 된 회원들의 추천으로 한국소형영화제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그 역할을 잘 해 냈는지 15, 16대 회장직까지 연임하게 되었다.
회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나는 늘 회원들이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특별한 촬영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또 어떻게 하면 더 마음 편히 촬영에 임할 수 있을지 방법도 고민했다. 그래서 촬영 대회 때 후지필름의 협찬을 얻어내기도 하고 여건이 될 때마다 회원들과 자주 해외 촬영길에도 올랐다. 그때까지 국내 관광지나 자기 집 실내가 촬영지의 전부였던 회원들은 나의 이런 기획을 크게 환영 했다. 소형영화인들의 해외 촬영은 전임회장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해, 하와이, 캐나다 록키산맥, 사이판, 괌, 일본, 대만, 홍콩 등 수많은 여행지에서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은 회원들 각자의 카메라를 통해 다양한 색깔의 이야기들로 완성되었다. 그런 다양한 활동은 점점 여러 언론을 통해 대외적으로 소개되었고 1987년 7월27일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가 문화공보부에 정식 사회단체로 등록되었다. 지금도 그 시절 회원들을 만나면 “회장님 덕분에 세상 구경 참 많이 했습니다. 그때 찍은 작품이 제 최고의 역작입니다.”라고 감사를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처럼 소형영화협회장 시절의 주요업적 중 첫 번째로 평가되는 것이 바로 개인의 취미생활 수준에 머물던 소형영화 협회를 정식 사회단체인 한국영상작가협회로 공인받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나 또한 회원들에게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었던 것에 무엇보다 큰 보람을 느꼈다.
정식 사회단체로 승격된 이후 회원들의 열정과 의욕은 더욱 높아졌다. 회장인 나 또한 작품의 수가 늘어 갈수록 더 좋은 작품에 대한 열망과 욕심이 커져가는 회원들의 기대를 채워 줄 만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고 그 결과 찾아 낸 해답이 바로 서울 국제아마추어영화제였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 여건상 그 계획 자체가 언어도단과 다름없었다. 상업 영화계에서도 감히 해내지 못한 일을 소형영화작가 협회장이 개최를 해보겠다고 나서니 다들 그 무모함에 코웃음 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협회 회원들과 임원들조차 회의적 태도를 보였다.
모두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재정 문제였다. 큰 대회 개최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과제는 재정확보다. 그런데 국내에서조차 아직 소형영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형편인데 국제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준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나의 오기가 또 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가능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일도 불가능하지만. 난 불가능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신감을 다지며 국제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를 확신했다.
처음에는 반대 하던 주위에서도 하나 둘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획안을 만들고 도움을 줄 단체와 인사들 명단을 확보하며 서울국제영화제 개최를 준비해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그 몇 년 전 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외 유수의 국제단편영화제에 참석해 세계 유명 영화단체들과 유력인사들의 명단을 확보한 상태였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영화제를 개최할 가능성에 대비해 미리 준비해둔 것이 그 기회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협조를 요청하는 나의 연락이 해외 영화인들은 두말없이 세계 15개국 29개 아마추어단체와 국제 아마추어영화제를 개최한 단체의 운영진 연락처를 보내 주었다. 모두 소형영화 분야에서는 많은 수상 경력을 가진 영화인이거나 명성을 가진 단체들에게 서울국제아마추어 영화제에 대한 취지와 안내문을 보내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동시에 국내에서도 개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 작업에 나섰다. 처음에는 아시아 그것도 소형영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대규모 국제영화제 개최 의사에 회의적이던 국내 영화계 인사들도 조금씩 태도의 변화를 보이며 도움을 청하는 내게 영화제 성공을 위한 청사진에 흥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끔 서울국제아마추어영화제에 대해 정보가 부족하다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던 해외단체들도 있었다. 그럴 때는 집요할만큼 자주 서신과 전화 연락을 하며 참가요청을 부탁했고 그 결과 세계 각국 영화단체들과 영화인들로부터 ‘영화제 성공을 기원한다’는 격려 편지와 작품을 출품하겠다는 약속이 전해왔다. 특히 해외 관계자들은 영화제의 품격과 수준을 높이기 위해 서울 국제아마추어영화제의 출품 규정을 국제아마추어영화제에서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둔 작품으로 제한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몇 달의 긴 시간동안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한 결과 우리나라는 개최국에게 주어지는 혜택으로 국제아마추어영화제 8mm영화 부문에서 최상위권 입상작과 추천작 12편까지 무상으로 제공 받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 나온 만큼 그동안 영화제 개최에 회의적이었던 원로분들과 임원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한층 명분이 생겼다. 일반 관객들을 상대로 국제영화제 개최를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간행물도 제작해 선보였다.
협회 회원들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노력해주고 나를 비롯한 운영진들도 다방면으로 애를 쓴 결과 마침내 1988년 5월 18일 서울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서울프레스센터 국제회의실에서 제 1회 서울국제아마추어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가능성조차 꿈꿔 보지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 우리 영화계에도 이루어 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