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산을 타는 것을 좋아해 시간이 날 때면 자주 산에 오르곤 한다. 명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친분이 있는 동료들과 산악회를 결성해 시간 날 때마다 등산길에 오르곤 했다. 또 UNICA 한국협회장 재임 시절에도 매주 세 번째 토요일을 정기 산행일로 정해 회원들과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작품 촬영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산세가 험하지 않은 산이라면 후배 영화인들이나 지인들을 따라 놀며 쉬며 오르기도 하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중도에서 쉬다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산에 오를 때마다 내 눈에 꼭 들어오는 것이 있다. 위험지역이나 사고에 대비해 정해진 등산로를 안내하는 이정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표식에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정상을 향해 앞만 보며 급히 내달린다. 그러다 보니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나 갑자기 나타난 불행한 사고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행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 주는 이는 아주 중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이란 거대한 산은 높고도 험준하다. 가파른 오르막도 깊은 골짜기도 있다. 자칫 방심하다 보면 길이 아닌 길로 접어들기 십상이고 때로 전혀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 생사의 기로에 놓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귀감이 되거나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좋은 스승이나 친구를 만나게 된다. 때로 직장 동료나 선후배 일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 가에 따라 그 삶의 모습과 품격이 달라진다고 한다. 좋은 동행자를 만나면 결코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으며 그 어떤 길도 길지 않은 법이다.
내 인생도 그러했다. 좋은 인복을 타고나 성실하고 우직한 성품을 귀히 여겨주는 고마운 분들을 만났고 타고난 재능 그 이상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인연들과 맺어졌다. 영화인으로서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우리영화계의 전통인 도제 훈련을 통해 영화를 배운 것도 아닌데 어떤 편견이나 무시하는 경우 없이 내가 가진 실력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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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형영화제 촬영대회에서 / 맨 오른쪽이 유현목 감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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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운이 가능했던 것은 영화계에서 만난 세 사람과의 특별한 인연 덕분이었다. 물론 영화계에서 내게 주어진 많은 기회와 성공적인 평가를 얻게 된 공을 어찌 세 분에게만 돌릴 수 있겠는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이 소중히 아껴주고 마음으로 성원을 보내준 덕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노구의 몸이라도 이끌고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시간과 체력이 허락지 않으니 그저 이 책을 빌어 다시 한 번 마음으로 보살펴 주시고 믿음을 주신 것에 죄송스러울 다름이다.
먼저 출판된 책에서도 세 분을 언급한 적이 있기에 아마 기억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분들의 이름을 또 한 번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 마음의 빚을 진 자의 송구함 때문이라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늦깎이로 영화를 시작해 주목 받을 만한 대단한 영화 이력을 가진 것도 아닌 평범한 사나이가 우리나라 단편영화의 수장을 거쳐 세계 UNICA협회 한국 대표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은 믿음과 신뢰를 나를 지켜준 영화계 세 분의 선배 덕분이었다.
먼저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었던 고 유현목 감독과의 인연부터 언급하고자 한다. 1세대 한국 영화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유 감독은 한국 영화사에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파격적인 리얼리즘 영화를 선보이며 한국 장편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업을 할 때는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이었지만 사석에서는 참으로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양반이었다.
유 감독과의 인연은 역시 같은 영화인이자 감독인 하한수씨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남 앞에서 나서거나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데도 유 감독은 이런 나의 천성 너머 잠재된 재능과 성실함을 귀하게 여겨주셨고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나의 열정에도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서울국제영화제를 통해 회장으로서 보여준 추진력과 리더쉽을 높이 평가했다.
그 분 덕분에 우리나라 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시 시인이자 문화부장관이었던 정한모씨, 김동호 전 문화부 차관이자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위원장, 그 밖에 수많은 국내 영화계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고 그분들의 열성적인 도움에 힘입어 UNICA회원국 가입이라는 목표도 이룰 수 있었다.
같은 길을 걸었던 동료로서 유현목 감독에게 특히 감사드리고 싶은 점은 영화인으로서의 품격과 정신을 가르쳐주신 점이다. 목표를 정하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완고하리만치 철저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뜻을 이루어낸 점이다. 그래서 작품도, 영화인으로서의 삶도 맑고 고매했다. 그 분을 스승이자 동료로 둔 덕분에 나 역시 이런저런 소문이나 무리에 흔들리지 않고 내 스스로 정한 길을 오롯이 따라 걸어올 수 있었다.
두 번째 은인은 2004년 8월 제66차 UNICA 총회와 제 66회 UNICA 세계영화제를 주관했던 독일 아이힘 스템플 협회장이다.
UNICA 가입 초창기 시절 보이지 않는 편견과 견제로 혼자 속앓이를 꽤 많이 했었다. 하지만 천성이 유쾌하고 다정했던 스템플 회장은 한국 영화가 UNICA를 기반으로 더욱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항상 조언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사람 좋아 보이는 선한 그 양반의 미소가 훤히 그려진다.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한 그 분은 자국 협회의 발전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는 성격 탓에 독일에서 열리는 영화제 준비과정에서도 지나치게 자신을 혹사했던 모양이다. 영화제가 막을 내린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UNICA 본부로 부터 그의 부음이 전해졌다.
이 나이가 되고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과 사가 한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전해 들어도 비교적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스템플 회장의 부고 소식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국의 영화 발전과 젊은 영화인들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건강조차 돌보지 않고 일에 전념했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아마 그 분의 헌신적인 모습에서 또 다른 내가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