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
남편일로 정신없이 1998년 여름을 지냈다. 9월 8일 드디어 교수직을 마감하는 정년 퇴임식과 출판기념회를 힐튼호텔 컨벤션 홀에서 가졌다. 남편이 계속 장관으로 있었다면 조촐한 장소로 정하려고 했으나 그이도 그만 두었으니 힐튼에서 하자는 제자들의 권유를 그대로 따랐다. 남편이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니 손님도 얼마 안 올 것 같아서 너무 큰 장소가 아닌가 불안했다. 식사도 300명 정도의 뷔페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1000 여명이 몰려와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날 호텔 앞의 교통이 혼잡했다는 뒷얘기를 들으며 남편의 그늘을 새삼스레 확인하였다. 해임된 지 한 달 밖에 안 되는데도 전혀 내색도 하지 않고 하객들과 인사하며 외조를 아끼지 않았던 그이가 너무 고마웠다. 또 바쁜데도 참석해 주었던 모든 하객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강원용 목사님과 성신여대 이세웅 이사장의 축사, 그리고 강영훈 전 총리의 건배사가 있었고 50대가 훌쩍 넘은 이대 제자들과 성신여대 젊은 제자들이 합동으로 스승의 노래를 부를 때는 저절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날 참석해서 노래를 불러준 이대 정외과 17기 졸업생들은 근 20년간 매해 스승의 날에 나를 초대해 주는 제자들이었다.
이날 퇴임식과 더불어 출간한 책은, 하나는 젊은 남성 정치학 박사들과 공동 집필한 『미국외교정책의 이론과 실제』, 또 하나는 여성정치학 박사 후배들과 공동집필한 『21세기 여성과 정치』, 그리고 제자들이 만들어 준 『오늘을 위해 남겨둔 이야기』등 3권이었다. 그 가운데 ⌜오늘을 위해 남겨둔 이야기⌟ 책에 이어령 장관께서 ‘우리가 지금 이 노래를 바치는 까닭’이라는 제목으로 나에 대해 분에 넘치는 ‘헌사’를 써주셔서 고마운 마음 금할수 없었다. 그 글은 아래와 같다.
|
「신은 꽃에게 아름다운 꽃잎을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생각할 줄 아는 힘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신은 꽃에게 향기를 주었지만 슬프게도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암향부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때로는 그 그윽한 향기가 10리밖까지 뻗칠 수가 있지만 어떤 꽃도 제자리를 떠나 우리에게 올 수는 없습니다.
신은 꽃에게 열배를 맺는 힘을 주었지만 스스로 그 씨를 멀리 뿌리고 가꿀 수 있는 힘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람 없이는 그 씨앗을 우리에게로 보내 자라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여기 아름다우면서도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지성의 꽃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향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움직일 줄 아는 행동의 꽃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그 맺은 씨앗을 우리 마음속으로 보내 가꿔주는 자애의 꽃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가정과 학원을 한 울치리 안에 들이고 학회와 국회를 한마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자가 꽃보다 더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 준 한 사람을 위해서 이 축배를 바칩니다. 우리는 지금 지성의 꽃, 행동의 꽃, 자애의 꽃을 기리기 위해서 이 작은 노래를 바칩니다.」 |
퇴임식 행사에 김우중 회장도 참석해주었다. 힐튼호텔은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부인 정희자씨가 애지중지하며 가꾸어놓은 아름다운 호텔로서 한국의 자랑이었는데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게 된 이후 그곳에 갈 때마다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남편의 후배인 김우중 회장이 귀국도 못하고 외국에 머물고 있을 때도 그이는 병석에서도 늘 안타까워했다.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교직 생활을 마감하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가?’라는 물음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느 한쪽도 완벽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사람은 능력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는 영국 속담을 상기하며 내가 걸어온 발자국은 나의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후회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훈장이 좋은 직업임을 퇴임 후에 더욱 절감한다.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제자들, 외국기업에서 쟁쟁한 전문인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제자들, 현모양처로 내조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제자들… 지금도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행복하다. 이대와 성신여대 양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기에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쟁쟁한 제자들이 내 재산이다.
컴퓨터와 골프 강습
정년퇴임식이 끝나자 남편에게 약속했던 두 가지를 실행에 옮겼다. 하나는 컴퓨터 강습, 또 하나는 골프 강습이었다. 우선 한타 연습을 두 주일간 하루에 4시간씩 했다. 영타 속도가 빨라서인지 두주일 지나고 나니 그런대로 좌판을 보지 않고도 한타를 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이메일을 보내고 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첨부파일 보내는 것 등 그때그때 필요한 사항은 전산학과 교수인 며느리가 일요일에 올 때마다 가르쳐 주었고 지금은 컴퓨터의 신세를 톡톡히 지고 있다.
골프는 노년에 부부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건강 유지에 좋은 스포츠라고 주위에서 권하기도 했고, 그이도 배워두라고 권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미루다가 정년퇴임 후에 배우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래서 퇴임하자마자 집 앞에 있는 골프연습장에서 레슨을 받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진도가 늦었다. 처음 몇 달간은 재미가 없어서, 좌절감만 안겨주는 운동을 왜 배워야 하나 하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었다.
洙友會 초청을 받아 동경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요꼬하마 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주일 총영사 내외가 주최한 일본인 유지들, 재일 교포 지도자들과의 만찬에 참석했는데, 김 총영사는 만찬 외에 골프 예약도 해놓았다.
나는 골프를 배운지 2개월 밖에 안 되었을 때여서 사양했으나 김 총영사 부인도 나온다고 꼭 한번 해 보라고 해서 용감무쌍하게도 7번 아이언 하나를 갖고 세 사람을 따라 나섰다. 그들이 한번 치면 나는 세 번 네 번 치면서 18 홀까지 따라 다녔더니 다음날 아침에 입술이 부풀었다. 그렇게 해서 첫 머리를 올리게 되었다.
아무리 내색을 하지 않아도 심란해 할 그이의 기분도 전환해 줄 겸 오랜만에 아파트를 수리하기로 하고 도배도 커튼도 새로 바꾸느라고 한동안 분주하게 지냈다.
우리는 78년도에 삼호아파트에 입주한 후 다른 곳으로 이사할 엄두도 못 내고 25년 넘게 살아왔다. 같은 아파트 주민들은 길 건너 새 아파트가 올라가자 그쪽으로 옮겨갔고 또 한참 있다가 바로 옆에 새 아파트가 올라가니까 또 일부 주민들이 이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돈을 번다고 들었지만 우리는 매번 타이밍을 놓치거나 시간이 없어서 기회를 놓쳤다. 실은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아서는 새 아파트를 사는데 역부족이어서 한 곳에 오래 머물다 보니 옛날 건물이라 수리할 데가 많았다.
정년퇴임하면 심리적으로 우울해진다는 말을 들었으나 남편이 옆에 건재해서인지 오히려 시간적 여유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