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는 98년 8월 외교부 장관직을 마치고 국회의원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 해 10월 27일 터키건국 75주년 경축기념식을 위한 김대중 대통령 특사로 터키의 수도 Ankara에 다녀 온 후 정기국회 활동으로 분주했다. 마치 한 여름의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와 같다고나 할까. 우리는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고 그의 마지막 국회 임기를 무사히 마치는데 초점을 두고 지냈다.
미 의회 방문단장
초당적으로 구성된 국회대표단 (자민련의 김현욱의원, 한나라당의 한승수 의원, 국민회의의 유재건 의원과 양성철 의원)을 이끌고 그이는 99년 1월 30일 미국으로 떠났다.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미 의회의 이해와 지지, 제네바 합의의 중요성 강조와 원활한 이행을 위한 협조 요청, 금창리 지하시설과 북한 미사일 문제의 대응정책 협의, 우리 경제회복과 구조조정 노력을 설명하는 활동 등을 목적으로 했다.
일주일간 대표단은 미 의회 상원의원 7명과 하원의원 20명 등 총 27명의 의원과 미국무성 관계자와 주요연구소 간담회 참석관계자(180명)들과 면담을 하느라고 눈코 뜰 사이 없이 지냈다고 했다. 미 의회방문 국회대표단 보고서는 99년 1월 30일-2월 8일 동안의 활동사항을 사진과 함께 그 모든 내용을 93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이신범 의원이 과다한 예산을 사용했다고 문제 제기를 해서 모 일간지 사설에 비난의 글이 실린 일이 있었다.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대표단 전원이 회의를 하고, 97년 이신범의원이 포함된 의원단이 방미했을 때는 더 많은 예산을 썼고 활동내역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반격을 가하고, 사설이 실린 신문사에 사과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신범 의원은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나의 이대 제자인 유명자의 남자친구였다. 명자가 이대를 졸업한 후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데모를 해서 구속이 되어 자기만 남게 되었다고 했다. 딱한 사정을 듣고 나는 남편에게 말해서 그이 친구가 사장으로 있던 그레이하운드 회사에 취직을 시켜준 적이 있다. 그 후 남자친구가 석방되었는데 여권이 안 나온다고 해서 국회의원이었던 내가 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바로 그 남자친구가 이신범 의원이다.
IPU 집행위원회: Vienna, Austria
2000년도에 개최될 세계국회의장회의 준비를 위한 IPU 집행위원회가 99년 2월 20일부터 비엔나에서 열렸다. 정년퇴임 후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나도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가 가 있는 동안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별로 좋은 인상은 받지 못했으나, 반기문 대사 부인의 안내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다뉴브 강을 따라 드라이브하면서 본 주위 경치는 퍽 인상적이었다. 꽃이 피는 봄이면 더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했지만 꽃이 없어도 좋았다.
베토벤, 모찰트, 요한스트라우스, 슈베르트, 브람스 등 유명한 음악가들의 묘지를 찾은 날은 눈발이 날렸고 추워서 한가하게 돌아보지는 못했으나, 유명인들의 묘지 치고는 다닥다닥 붙어 있고 일기 때문인지 음산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비엔나의 숲’이라는 음악 때문에 그곳에 가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그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나무들의 숲이었다. 겨울이라 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들이었지만 웅장했다. 그래서 베토벤은 이 숲을 거닐며 교향곡의 악상을 떠 올리지 않았을까?
주 오스트리아 한국대사관저는 다른 곳에 비해 아주 초라한 건물이었다. 비엔나라는 도시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건물이 아니었다. 귀국 후 그이가 외무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환기시켜서 오스트리아의 한국 대사관저 구입 예산에 관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들었는데 얼마 전 반기문 외교부 장관에 의하면 그 당시 새 관저를 물색하다가 예산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반 대사 내외의 초청으로 베르디의 작품인 오페라 ‘가면무도회’를 관람을 했다. 예술의 본산지인 비엔나에서 보는 오페라였기에 기대도 컸다. 주인공이 너무 뚱뚱하고 별로 아름답지 않아서 우리 두 내외는 그 여자가 주인공인 줄 모르고 언제나 아름다운 주인공이 나오나 기다렸으나 결국 그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실소를 하고 말았다.
귀국길에 아름답다고 소문난 체코의 프라하에 들렸다. 1박 2일 여정이어서 많이 다니지는 못했으나 체코필하모니 교향악단 연주회에 함명철 대사의 안내로 갔다. 소림이라는 일본인 지휘자와 일본 여성 피아니스트의 열정적인 공연에 푹 빠졌다. 대부분이 머리가 희끗 희끗한 노부부들이 좌석을 메웠는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열렬히 박수를 치는 등 격조 높은 관객들이 인상적이었다.
그 다음에 로마에 가서 정태익 대사 부부와 바티칸의 김흥수 대사 부부의 안내로 현대 발레를 관람했다. 한국의 김복희 무용단이 로마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 ‘피의 결혼’을 이태리 무용단의 공연으로 보았다. 현대무용은 나에게는 난해했다. 정태익 대사부인은 로마의 작은 규모의 박물관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좋은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모처럼 오페라, 음악회, 현대무용 등 좋은 문화 공연을 감상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청와대 오찬
99년 4월 6일, 남편이 장관직을 고만 둔지 8개월 만에 대통령은 전 장관들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다. 김선길 전 해양수산부장관, 배순훈 정보통신부장관, 강창희 건교부장관, 그리고 우리 내외가 참석했다. 주양자 전 보사부장관은 해외 출타 중이었고 윤후정 여성특위 위원장은 병환으로 불참했다.
DJ정부 출범 1년 1개월 만에 여섯 부처나 개각이 되었다는 뜻이다. 임기동안에 장관이 100 여명이 되었다는 YS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던 여당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김 대통령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또 김선길 장관에게 “사건이 있어서 고만두었고,” 그이에게는 “운이 없었고 억울하게 되었어요” 라고 했다. 뒤늦게나마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자리에서 영부인이 나에게 여성특위 자리를 왜 사양했느냐고 물으셨다. 무슨 말이냐면 남편이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김중권 비서실장이 나에게 전화로 윤후정 여성특위 위원장 후임이 될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과거에 그 이상의 직책도 가정을 위해서 사양해 왔는데 억울하게 장관직에서 물러난 남편을 두고 내가 감투를 쓰고 싶지 않아서 사양한 적이 있었다.
나는 영부인께 “남편에게 불이익이 가는 것을 원치 않아서”라고 대답하고 미국사회에서는 돌(Dole)상원의원 내외같이 남편은 상원의원, 아내는 적십자사 총재로 부부가 감투를 쓰고 활동을 할 수 있지만 한국의 풍토는 아직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더니 “지금부터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아쉬워 하셨다. 그래서 그 자리는 영부인이 추천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성지도자들이 나에게 남편이 억울하게 장관직을 내놓은 후 영부인의 위로 전화를 받았느냐, 대통령이 위로 식사에 초대해 주었느냐 등 질문을 많이 받아오다가 8개월 만에 이루어진 만남이어서 서운한 감정이 덜어졌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전직 장관들이 자기들을 ‘OB group’이라고 부르자고 하고 그이를 회장, 제일 어린 강창희 장관을 간사로 하자고 했다. 제일 먼저 강창희 장관의 초대로 한번 모인 후 두서너 번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이의 투병생활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