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U man_2 ((111회)

마지막 백림 IPU 총회 참석

99년 10월 8일에서 16일까지 백림에서 IPU총회가 개최될 때 통독 후의 독일이 보고 싶어서 남편을 따라 나섰다. 그이는 총회 이전에 소집되는 집행위원회 참석 때문에 먼저 떠났고, 나는 다른 국회대표단들과 함께 며칠 후 뒤따라갔다.

남편들이 회의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부인들은 주최 측에서 마련한 관광버스에 타고 동백림 장벽의 현장, 국회의사당 등 분단의 흔적을 관광할 기회를 가졌다. 통일된 독일이 궁금했는지 각 국가 의원들의 가족들도 다른 총회 때보다 대거 참석하게 되어서 수백 명이 여러 버스에 나누어 탔다.

동독인들이 살았던 마을에도 가보았다. 서독에서 볼 수 있는 건물에 비하면 낡았고 빈곤의 흔적이 역역했다. 그러나 동독의 당 간부들이 살던 주택단지는 별천지라고 했다. 항가리의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도 관광안내원이 우리를 당 간부들이 살던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은 호화스러운 주택에서 살았다고 비꼬았다. 계급없는 평등사회는 공산주의의 구호일 뿐 실제로는 국가권력층의 신부르조아 계급과 나머지 무산계급간의 차이가 두드러진 것이 전 공산국가의 현실임이 증면되었다.

서독인들 대부분이 통일의 기쁨보다는 통일로 빚어진 문제점들을 더 고민하는 듯한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무너진 동백림 장벽의 흔적을 부러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스페인 의원이 IPU 의장이었는데 EU의장으로 발령이 나서 임기 1년 전에 공석이 된 의장 선출이 있는 총회였다. 총회 역사상 아시아 정치인이 한번도 의장직을 맡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아시아에 자리를 넘기자는 분위기속에서 많은 국가들이 ‘IPU 맨인 한국의 박정수’를 의장후보로 하자는 여론이 컸다. 그래서 공식 출마를 선언한 인도의 헵툴라(Heptular) 여성의원이 총회 전에 그이에게 수차 한국으로 전화를 하고 언제쯤 공식출마 선언을 하느냐고 무척 신경을 썼다.

그이는 국회 임기가 그 다음해면 끝이 나는데 국제기구 의장직을 빌미로 국회직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고 기권을 선택했다. 출마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이가 출마포기를 선언하자 인도대표는 단독후보로 무투표 당선되는 행운을 얻었다. 유럽의 twelve plus 국가대표들이 “의례히 IPU 부의장인 당신이 출마하리라고 믿고 서방측에서는 후보를 내지 않았다”며 무척 아쉬워했다.

그동안 남편 따라 여러 번 IPU총회에 참석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알게 된 의원들도 나에게 왜 남편이 출마를 포기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헵둘라 인도대표는 유능하긴 하나 개인적인 인기는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신기한 것은 70년대에 내가 의원자격으로 IPU총회 대표로 다닐 때 알게 된 의원들이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나만 보면 매번 반가워했다.

20여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최초의 아시아 정치인 의장 자리를, 눈앞에 두고도 포기해야 한 그의 심정이 착잡했으리라. 정희경 의원은 의장선출 총회라는 사실을 모르고 갔다가 의장선거 후 다른 국가 대표들이 아쉬워하는 것을 보고 “내 잘못이야. 내가 오기 전에 대통령과 독대를 해서 설득을 했어야 했는데”라고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살아오는 고비 고비마다 이렇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뭔가를 놓치고 마는 불운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단련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도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고 위로했다.

▲ IPU총회 의장 출마포기를 선언한 후 단독 후보로 의장이 된 인도의 햅둘라 의원을 축하해주고 있다

‘IPU Man’ 박정수와 에피소드

1980년 10대 국회에서 무소속이었던 그이가 처음으로 67차 국제의원연맹(IPU) 총회 대표로 동백림에 다녀왔다. 냉전 체제하의 공산국가에서 개최되는 회의여서 한국 대표단은 긴장이 되었었다고 한다.

동백림 비행장에서 세관원이 한국의원들에게 잠깐 옆방으로 가자고 해서 대표단을 귀빈으로 대접하는 것으로 짐작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 방에는 벽에 사람 형태의 윤곽이 그려 있고 한 사람씩 그 그림 윤곽 앞에 두 팔을 벌리고 벽을 향해 서서 몸수색을 당했다는 것이다. 회의장에서 만난 한 북한대표가 그이에게 다가오더니 “부인은 이제 정치를 그만 두었습니까?”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니 대단하시네요”라고 말을 걸어서 그들의 정보력에 놀랐다고 했다.

12대 총선에서 그이가 낙선해서 IPU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을 때 북한 대표들이 우리 대표들에게 “박정수 선생은 숙청당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해서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다. 1990년 싸이프러스의 수도 니코시아에서 개최된 83차 IPU 총회에 갔을 때 이야기이다. 우리 대표단이 북한 대표단에게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제의하면 “미군철수 후에나 하자”고 하더니 사이프러스에서는 웬일로 그들이 제의를 수락했다. 우리 측 대표들은 조순승, 김원기, 오유방, 도영심, 권헌성, 최각규 의원들이었고 북측에서는 김국헌 단장, 김수만, 리창하 씨 등이 참석했을 때였다.

부인들이 주최국이 준비한 프로그램에 따라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호텔로 오니까, 그날 남북 대표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오찬을 같이 했다고 한다. 우리 측이 제의해서 성사된 오찬이어서 식사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자 북측에서 극구 자기들이 내야한다고 우겨서 말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인삼주를 갖고 와서 술도 많이 마셨는데 앞으로는 총회 때마다 남북대표들의 회식을 갖자고 약속했고 다음에는 우리 측이 낼 차례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IPU총회에 20년간 참석하는 동안 남북 대표단이 회식을 같이 한 케이스는 사이프러스에서의 오찬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했다. 사이프러스에서 남측 대표단과 회식을 해서인지, 김국헌 단장은 그 후 오지 않고 양형섭, 리몽호씨 등이 단장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그 다음해 Punta del Este, Uruguay 총회에서는 북한의 리몽호 단장이 보통 때보다 유난히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무국장이 “북한이 IPU총회를 유치하려고 하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대표들이 회원국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분주히 다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이가 북한 단장을 만나서 “총회를 유치하려면 누구보다도 우리와 의논을 해야지요...”라고 하니까 그것이 아니라고 우물우물하며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대표들이 만나는 국가 대표들마다 한국과 의논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니까, 그때서야 할 수 없이 실은 자기들도 평양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이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북한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태국가 모임과 발언권이 센 유럽회원국들의 모임에서 평양총회를 한국은 적극 지지하니 꼭 성사 되도록 도와 달라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이는 북한대표들이 표현은 안했어도 속으로는 자신의 적극적인 지원에 놀랐고 또 고맙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평양유치 때문인지 당시 총회에는 북한 대표단 인원이 많았던 것으로 들었다. 리몽호 단장 외 진창국, 마연일, 윤병철, 이창세 대표 등이 참석했다고 한다.

사이프러스에서 회식이 있은 후 단장인 그이가 여러 차례 북한 대표단에 접근을 시도했으나 다시 과거의 상투적인 ‘미군철수’를 이유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매번 총회에 갈 때마다 다시 시도해보라고 말하면 나중에는 짜증을 내며 “나 이상으로 북한 사람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안 되는 일을 뻔히 알면서 왜 자꾸 스타일을 구겨야 해? 새로 대표단에 포함되어 오는 우리 의원들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접근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망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