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 포럼 설립(The New Millennium Forum)
15대 국회임기 후반에 그이는 새천년포럼 설립구상에 시간을 보내더니 99년 12월 22일 출범시켰다. 외교부에 등록하고 국세청 인가도 받았다. 이 포럼의 기본 목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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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주변국에 대한 한국의 외교는 주로 정부간 공식채널에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 외교는 민간부문의 비공식 채널을 통한 의견교환이나 상호이해를 통해 보완되지 못 했다. 그에 따라 어떤 현안이 발생하기 이전에 사전조정을 하거나 현안발생시 불필요한 마찰이나 잡음의 소지를 제거하는 것도 힘들었다.
또한 탈냉전 세계화 추세에 걸맞게 전통적인 정부간 외교에 더하여 이제 한국외교도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외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시점에 있다. 즉, 현안이 발생했을 때, 상대국 정부 관료들만을 대상으로 일시적으로 접촉해온 정부간 외교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국 행정부 관료 이외에도 한국에 대한 외교정책 결정의 기저를 이루는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등을 대상으로 항시적이고 다원적인 관계 형성을 적극적으로, 그러나 조용하게 추진해야 될 때이다. 이를 통해 한국외교의 폭을 넓히고 기저를 다짐으로써 정부간 외교의 수행을 보완하고 한국의 국익을 증진하는 민간 레벨의 외교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새천년포럼은 이러한 역할을 주도함으로써 다가오는 새 천년에 전개될 변화무쌍한 국제정세 속에서 특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아세안, EU 등 중요 국가들에게 한국외교의 방향을 이해시키고 지속적으로 한국의 입장을 비공식적 차원에서 전달하고 상호간 협력을 증진시킴으로써 한국의 국가이익을 증대하는 민간 외교네트웍을 형성 유지하는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
이사진을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하고, 언젠가는 이 포럼을 아세아의 다보스로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동기에서 시작을 했다. 외국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방한할 때면 간담회를 개최해서 외교 현안에 대한 토론회도 여러 차례 가졌다. 그러나 2000년도부터 그이의 암 투병이 시작되어 뜻대로 되지 못했다. 그이가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포럼 사무총장인 김영재 청주대학교 정외과 교수를 통해서 중단하지 않고 명맥은 이어왔다.
그이가 생존해 있다면 뭔가 해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너무 아쉽고 가슴이 아프다. 지금은 내가 이사장을 맡아 남편의 유지를 이끌어 가려고 노력은 하지만 민간외교 부문에 대한 그이의 원래 의도를 살리지 못하고 있고, 현안에 대한 세미나 개최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외교부 장관직에서 해방되고 국회로 돌아온 후에도 공식 업무로 바쁘기는 했어도 지역구 의원일 때 보다는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99년은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이어령 교수 부부의 초대
평론가인 강인숙 교수는 경기여고 때부터 한 동네에서 살면서 등교도 같이 한 친한 친구이다. 내가 미국 유학 후 그 친구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의 클래스메이트인 이어령 씨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강원용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다. 어느 해인가 인숙이 남편이 프랑스를 거쳐 워싱톤을 방문한다고 해서 ‘인숙이는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을까’하는 호기심을 갖고 그이와 같이 비행장에 나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귀국 후에도 계속 그 집 부부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만나면 소위 코드가 맞는다고나 할까. 늘 대화가 꾸밈없고 부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심각한 대화도 하는가 하면 어린애들 같이 킬킬거리며 농담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인숙이네는 부부 문학박사요 부부 문학평론가이고, 우리는 부부 정치학 박사요 부부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 분야는 달라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남편을 통해서 가까워진 사이보다는 아내를 통해서 가까워진 사이가 더 길게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역시 여성파워가 더 강하다는 뜻일까? 인숙이네가 불러 가면 문인들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고 우리가 자리를 마련하면 정계 사람들을 혼석시키는 예가 많았다. 그 집에서 황석영 씨, 최인 호씨, 변종하 씨 등 유명한 문인, 화가 등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두 부부만의 허물없는 만남을 더 즐겼다.
99년 초에 인숙이네 초대를 받아 갔다. 평소 우리부부가 존경하던 전숙희 여사와 김남조 여사가 왔다. 그 날의 모임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두 분이 1930년대 말에 체험한 연애담을 비롯해서 6・25 당시 부산에서의 낭낭클럽 이야기, 모윤숙 여사와 인도 메논 대사와의 로맨스에 이르기 까지 루머로만 듣던 이야기를 솔직하고 재미있게 털어놓는 것이다.
두 분 다 말씀하시는 표정에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 완고하던 30년대 말에 공개적인 연애를 하였다니 ‘과연 대단한 의식과 행동의 선구자들이었구나’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문인들은 감성이 풍부해야 글이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사회과학도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들이었다.
여름휴가
우리 내외는 여름휴가니 겨울 휴가니 하는 것은 모르고 살아왔다. 나도 학기 중에는 강의준비, 논문쓰기 등으로 남편 따라 지역구에 내려가지 못했지만 방학이 되면 김천에서 많은 시간을 지내야 했다. 해외여행도 공식회의 참석이 목적이므로 늘 비행기에서도 연설문 손질에 바빴다. 가끔 남편에게 졸라서 겨우 시간을 냈을 때 외에는 자기가 먼저 휴가 예약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99년 여름 웬일로 그이가 먼저 8월 14-21일 강원도의 피닉스 리조트에 예약을 했다고 해서 속으로 놀랐다. 그이가 스스로 쉬러 가자고 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피닉스 골프장에서 하루건너 골프도 쳤다.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기분으로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며칠 후 김선길 전 해양수산부 장관 내외가 와서 2~3일 같이 지냈는데, 그이가 저녁 식사만 끝나면 일찍 방으로 올라가니까 재미가 없었는지 먼저 떠났다. 후일 김 장관 부인이 그렇게 명랑한 박 장관이 그때부터 이미 몸이 괴로웠던 것 같이 보였다고 말했다.
둘이서 식당에 가면 피서객들 가운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어떤 사람들은 손자들 봐주기에 바쁜가 하면, 억지로 자손들 곁에 말도 없이 몸만 앉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웬일인지 별로 보기가 좋지 않았다. 그이에게 “나는 만일 혼자 남게 되면 절대로 아이들 휴가에 따라나서지 않을 거야”라고 했더니 “절대로”라는 말은 쉽게 쓰는 법이 아니라며 단정적으로 말하는 나의 버릇을 시정해 주었다.
그런 신세가 그로부터 4년 후에 내게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