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9월 22-27일 추석 연휴에는 오크 벨리에서 지냈다. 김선길 장관 내외와 유종해 박사 내외랑 세 부부가 같이 갔다. 남녀 팀으로 나뉘어 골프도 쳤는데, 김 장관 부인도 유 박사 부인도 구력이 대단한 분들이었다. 나는 1년 밖에 되지 않아서 그들로부터 배우면서 운동을 했으나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가 티 샷을 할 때면 제각기 자기 아내가 잘 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편들이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해댔다. 퍼팅을 할 때마다 그이가 방향을 똑바로 하라고 지적을 해주어도 자꾸 왼쪽으로 당기곤 하니까 “이 사람은 내 말을 잘 안 들어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모두 웃어대며 오랜만에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유종해 교수는 얌전해서 조용하게 말씀을 하지만 김 장관과 그이 목소리는 유난히 커서 두 사람이 웃는 소리는 먼 곳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김 장관은 그이와 같은 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미국 워싱톤에서는 다 같이 비슷한 고학생 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유종해 박사는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이며 부인은 나와 경기 동기이고 우리 두 집은 삼호 아파트 11동의 토박이로 살고 있었다.
노후의 재산이란 금전이 아니라 믿고 의지하고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맞는 세 부부가 오크 벨리에서 지낸 며칠간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에겐 그러한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기 때문이다.
식사 후 방에서 김 장관 부인의 특기인 빈대떡을 데워 먹었던 일, 과일을 같이 깎아 먹으며 담소하던 일,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유재건 의원 부인이 우리에게 잠 잘 자라고 준 캐모마일 차를 마셨던 일, 김 장관 부인과 내가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서 홀딱 밤을 새우고 새벽에 골프를 쳤던 일, 유 의원 부인이 7번 아이언만 갖고 골프를 치는데 키가 커서인지 의외로 거리가 멀리 나가 놀랐던 일 등 등...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오크 벨리에 가보니 유명인사들이 많이 와 있었다. 유재건 의원 부부를 비롯해서 박상규 의원, 정동영 의원, 김한길 의원, 차수명 의원, 천용택 국정원장 등 모두 부부동반으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일은 역시 국정원장의 신분은 아주 다르다는 점이다. 그 분들은 특별 빌라에 여장을 풀었다고 하며,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다니는 것을 우리는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평상시에도 그런 대우를 받는 어마어마한 자리인데 남편이 그 무서운 국정원의 대리전을 치렀으니…. 국정원은 별천지임에는 틀림없다고 느꼈다. 천용택 원장 내외는 국방장관 시절 외무장관 공관 바로 옆의 공관에서 살았을 땐 가깝게 지낸 사이였으나 국정원장 신분으로 만나게 되니 서먹서먹하게만 느껴졌다. 신분이 사람을 그렇게 변하게 하는 걸까?
2000년 1월 그이가 암 선고를 받기 전 해에 그이는 유난히 자주 나를 골프장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정년퇴임하고 무료할 것 같아 보였는지, 그 해는 둘 만의 여행, 둘만의 골프 시간을 많이 가졌다. 여름에는 운동을 마치고 나면 그이는 먼저 식당에 올라가서 내가 좋아하는 맥사이다(맥주와 사이다를 섞은 것)를 준비하고 나를 기다려주었고, “시원하다”며 맛있게 마시는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가족 모임
일요일 점심은 다섯 식구가 식사를 같이 했다. 손자인 태섭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요일 아침이면 우리 아파트로 와서 아침식사를 했다. 내가 해주는 팬케이크와 그 위에 얹어놓는 계란 후라이 그리고 직접 갈아서 만든 과일 주스, 서리태 콩물과 우유를 먹고 동네 교회로 갔다.
우리 가족 가운데 신앙심이 가장 돈독하고 기도도 제일 잘 하기 때문에 다섯 식구의 식사기도는 초등학교 때부터 태섭이의 몫이었다. 하루는 태섭이의 식사기도가 길어졌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국가를 위해 기도를 하니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너무 길다고 불평하니까 증조할머니 기도가 더 길었다고 항의를 해서 함께 웃었던 일도 있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온 주일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피곤하실 것 같다며 아침 먹으러 오지 않는 애어른 이였다.
내가 만든 팬케이크를 태섭이가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79년에 샌후란시스코에 사는 여고동기인 김형옥이를 방문했을 때였다. 형옥이의 남편인 쟌 리가 만든 아주 얇은 여러 장의 팬케이크가 너무 맛이 있어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통조림으로 된 배와 코냑 몇 방울을 넣으면 그렇게 맛이 있다고 해서 코냑만 빼고 배나 때로는 바나나 또는 사과를 조금씩 갈아서 팬케이크 믹스에 가미한다. 그리고 얇게 부쳐서 사이사이에 버터를 조금씩 바르면 특별한 맛을 낼 수가 있다. 태섭이가 자기 엄마도, 도우미 아줌마도 할머니 팬케이크 만큼 맛이 안 난다고 할 때면 우쭐해지곤 했다.
3대가 같이 식사할 때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가족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는 과정에서 은연중에 상호간의 유대가 깊어졌다. 또 우리 가족이 지켜야 할 가치관도 어린아이에게 심어주게 되어 교육적 효과가 크다는 것을 태섭이의 언행을 통해서 절실히 느꼈다.
그이는 아들과 손자에게 자기 부모님의 가르침을 전수하는데 주력했다. ‘길이 아니면 가지말라’ ‘소탐대실’ ‘정직이 최상의 길이다’ ‘오늘의 무질서는 내일의 자유를 빼앗는다’ 등을 반복해서 가훈같이 설명해 주면서 그런 것을 지키면 왜 본인에게 유익한가를 설득하는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아들, 며느리, 손자는 위의 말을 구호같이 외우고 있다.
역사책 읽기를 좋아하는 태섭이가 “할아버지, 역사책을 읽어보면 나라를 위해 일 하기 위해서는 역시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라고 자기 의견을 말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가 한마디씩 각자 견해를 말해준다. 자기가 반에서 발표왕 상을 탔는데 선생님이 선정한 것이 아니라 반 친구들이 선정한 상이라 더 의의가 있다고 자랑도 했다. 이런 대화는 대부분 우리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 이루어지곤 했다.
1999년 연말을 태섭이를 위해 롯데월드 호텔에서 2박 3일을 지내기로 했다. 스케이트도 타고 당시 한참 유행하던 DDR(dance dance revolution)도 할 수 있고 민속박물관도 관람하는 등 다목적으로 연휴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난히 그이가 기운이 없어하고 말 수가 줄어서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아이들만 더 놀라고 하고 일찍 방으로 들어가서 쉬자고 했다.
그러나 99년 마지막 날이라 세 아이들이 밤 12시 10분전에 우리 방으로 왔다. 해마다 우리 가족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순간을 텔레비전 앞에서 같이 보냈다. 태섭이가 더 어렸을 때는 머리에 꼬깔 모자를 쓰고 피리도 불면서 같이 ‘Happy, Healthy, New Year!(행복하고 건강한 새해)’를 외치며 서로를 포옹하고 키스도 하면서 새해를 맞이하곤 했다.
2000년은 새 천년이 시작되는 해라고 전 세계가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었다. 해와 달이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대자연 법칙은 요지부동인데 지구에서는 호들갑을 떤다고 비웃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TV에서는 방송국 프로마다 귀가 따갑도록 새천년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뒤 덮혔다. 우리에게는 2000년 봄이면 그이가 16대 국회임기를 마치는 해이며 따라서 나는 그 후의 남편의 진로에 대해 가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자기들 방으로 가자 그이는 멍하니 TV를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새천년이 왠지 나와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라고 말했다. 나는 불길한 생각에 그런 말을 왜 하느냐고 싫은 빛을 보였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예감이 들어서였을까? 호텔에 투숙하기 전 날, 변을 보는데 피가 많이 흘러서 삼성의료원의 최규완 원장에게 전화로 물어보았다. 최 원장이 치질일 수도 있으니 연휴가 끝나면 삼성의료원에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하자고 약속한 일이 마음에 걸렸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