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3일 그이는 삼성의료원에 건강 검진을 위해 입원했다. 본인도 나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뇨 때문에 식사량도 줄이고 당에 좋다는 것은 모두 구해서 섭취하면서, 체중이 주는 것은 당뇨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병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이는 매일 트레드밀에서 한 시간씩 걸었고 해외여행도 피곤함 없이 다녀오곤 해서 심각한 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감기도 잘 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오히려 툭하면 체하고 툭하면 독감에 걸려서 약으로 살다시피 했다. 한 침대를 쓰는데도 그이는 독감도 옮지 않았다. 부모님이 워낙 건강하여 한 분은 90세에 또 한 분은 96세에 돌아가신 장수 집안이었다.
1월 5일 최규완 원장이 나를 보자고 한다는 연락을 받고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암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삼성의료원 원장실에서 최 박사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장이 까맣게 되었고 막혀있어요” “간에도 전이가 되어 있어요” “미국이 대장암 치료로 알려져 있으니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시지요” “초기가 아니라 꽤 진전되었어요.”
나는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일 같이 들리고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최 박사님이 본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하고 입을 열면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지난 해 8월 삼성 건강센터에서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는 그런 신호가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서울대 병원에서는 당뇨 담당 의사가 간에 혈관종이 두 군데 보이지만 별일이 아니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럼 그것이 전이된 대장암이었단 말인가?
병실에서 나머지 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 앞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위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지던트에게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면 6개월 정도입니다. 4기인걸요.”
무표정하게 말해주는 레지던트가 냉혈동물로 보였다. 그날 밤 아들 내외와 중대병원 내과 과장인 조카 박인원이를 집으로 불렀다. 의사의 말을 전하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아이들도 얼굴이 사색이 되어 우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인원이는 수술을 하면 생존율이 20-40%는 되니 우선 수술을 서두르자고 제의했다.
한잠도 못 잤다. 아니 잘 수가 없었다. 누워있으니 가슴 부위에서 아랫배까지 따끔따끔 바늘로 쑤셔대는 통증이 엄습해 왔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맞는 말임이 입증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날 벼락을 맞다’는 표현이 당시 나의 기분을 두고 한 말 같다. 내 남편이 6개월 밖에 못산다니…. 청천 날벼락과 같은 현실이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무서워졌다. 남편 없는 나의 인생? 내가 어떻게 혼자 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 시험공부 하느라고 밤샘을 한 이후 처음으로 한 숨도 못 잤다. 혼자서 울다가, 생각하다가, 무서워 떨다가, 통증 때문에 타이레놀을 먹으러 일어났다가, 밤새도록 미친 사람같이 일어났다 누웠다 안절부절하다가 새벽을 맞았다. 갑자기 이 세상 천지에 나 홀로 내팽개쳐진 듯 겁이 나고 두렵고 외로웠다.
퉁퉁 분 눈을 하고 병원에 갔다. 최 원장이 알리기로 했는데 나는 그만 그이를 보는 순간 “만일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죽을 거야”라는 말이 튀어 나오면서 울부짖었다. 도저히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이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했는지 “언젠가는 다 가는 인생인데 나는 당신이 더 걱정이야.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은 없어” “아이들에게는 알리지 말았으면 해. 자동차 운전할 때 위험하니까” “지금 죽으면 국회장은 해주겠지” “죽으면 성연이를 만나게 되겠지. 하기야 성연이는 착하니까 좋은데 갔겠지만 나도 그런 곳으로 가게 될지 모르긴 하지만...” 등 전혀 동요된 빛을 보이지 않은 채 혼자 중얼거렸다. 그의 속은 오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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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PU총회 당시 가장 친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친한파 휙털 단장과 함께한 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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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그이는 의사를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 전효근 외과의사가 17일 일주일간 미국학회 참석으로 출국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날 대장 CT촬영을 하고 월요일에 수술을 하자고 해서 퇴원이 아닌 외출을 했다. 그이는 국회 본회의장으로 갔다.
저녁에는 다섯 식구가 같이 식사를 한 후 병원으로 모두 갔다. 밤이 되자 보호자들은 다 나가라는 방송이 나오자 그이는 극구 우리에게 집으로 가라고 고집했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태섭이가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같이 있으라”고 보챘다. 준비가 안 되어서 집으로 가는 것이고 할아버지가 원치 않는다고 했더니, 자기 집으로 간 후 다시 전화를 했다. “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외롭게 혼자 두고 오셨어요?”라고 나를 꾸짖었다. 이유를 설명해주면서 한 없이 눈물을 흘렸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우리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보이는 남편의 모습은 나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태섭이에게도 그 모습은 역시 안쓰럽게 비쳐진 모양이다. 할아버지를 향한 손자의 애틋한 마음이 나를 또 울게 만들었다.
정말로 남편과 이별을 하게 되나? 믿어지지 않았다. 믿지 말자! 요행을 바라자! 기적을 바라자! 하다가도 성연이 때, 범옥 언니 때, 올케 때, 모두 암과의 투병에서 속수무책임을 체험했던 나는 그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누워 있어도,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수술 전날은 금식을 해야 하니 “맛있는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라”는 간호사의 말이 있어서 점심과 저녁은 집에서 해 날랐다. 저녁 식사 후 그이는 링거를 매단 채로 나와 같이 병원복도를 40분간 걸었다.
전날 자기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충격을 받았고, 미국행 등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미국행은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단념하고 모두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성우는 “아버지가 대장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병원에서 같이 지낼 걸 잘못했다”며 “혼자 얼마나 외롭고 가슴 아프셨겠냐”며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꼭 병원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그이는 오히려 아들, 며느리를 위로하기 바빴다.
수술 전날부터 내가 병원에서 지내기로 하고 집에 도착해서 잘 왔다는 전화를 했다. 그이가 “I love you”라고 하는데 늘 듣던 말이건만 그날은 눈물이 앞을 가려서 말을 잊지 못했다. 한참 후 “I do, too” “I miss you, dad” 그리고 전화를 끊고 엎드려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일요일 아침 병원에 갔다. 핼쑥해 보이는 것 외는 식사도 잘하고 모든 것이 너무나도 정상적이어서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그이가 침대에 앉은 채 “참 잘 된 것이 두 가지가 있어”라고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골프를 배우게 했기 때문에 내가 가고 없어도 친구들과 운동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내 자동차를 성연이 장학재단 소속으로 만들면 당신이 쓸 수 있게 되니까 그 두 가지는 내가 안심이 되지”라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죽음을 앞에 둔 남자가 밤새 자기 사후의 아내를 생각할 여유가 있다니...... 그런 남편이 너무 측은해서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당신이 자동차 운전을 못했는데 재단 소속 차와 기사를 쓸 수 있으니까 마음이 놓인다는 거야”라고 그이는 덧 부쳤다. 미국 유학시절 운전면허를 따서 식품점 가는 정도는 운전을 했지만 귀국 후부터는 그이의 완강한 반대로 운전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그이는 또 “나야 가버리면 괜찮지만 가족에게 미안하지” 점점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안겨주는 말만 골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