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선고와 수술 (115회)

전효근 박사가 병실에 와서 다음 날 수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전 박사는 “대개 암 환자들이 두려워하고 우울해 하는데 박 장관님의 태연한 모습에 놀랐다”고 했다.

남편이 의연할수록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더 가엾고 견디기 힘들었다. 1973년에 하늘나라로 간 성연이가 아홉 살, 열 살 때였지만 의연하고 눈물겹도록 참을성이 많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성연이는 겁이 많고 침착하지 못한 엄마가 아니라 참을성이 많은 아빠를 닮았던 것이다.

정작 수술 받을 환자는 깊은 잠에 빠졌는데 나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딸도 남편도 무서운 암으로 잃는 형벌을 받아야 하나. 신세타령도 해보았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무심하실까?

드디어 수술하는 날. 근 4시간을 밖에서 기다렸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남편에게 달려가서 배 있는 부분을 만져 보았다. 개복한 후 사정에 따라서는 변을 보는 주머니를 밖으로 빼 놓을 수도 있다고 해서였다. 다행히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아서 일단 안심했다. 대장은 깨끗이 수술이 잘 되었는데 간은 손을 댈 수 없었다는 의사의 말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면 간으로 전이된 암은 어떻게 하나? 기왕 개복을 했으면 간 속의 암 부분도 절단을 할 것이지라는 원망과 걱정이 앞섰다.

워낙 건강한 사람이어서인지 수술 하루 만에 일어나고 그 다음 날부터 하루에 세 번 30분간씩 링거를 단 채 복도를 같이 걸었다. 의사가 운동을 해야만 장 회복이 빠르다고 했기 때문이다. 회복 속도가 빨라서 나는 기적을 바라게 되었다.

수술 후 열흘이 넘어도 항암치료에 대해서 말해주는 의사도 없던 차에 연세대학교 김병수 총장이 병문안을 왔다. 자기가 세브란스에서 가장 유능한 의사 두 사람에게 부탁을 해 놓을 테니 속히 항암 치료를 받으라는 권유가 있었다. 김병수 총장은 세브란스에서 가장 먼저 암 센터를 개설한 권위자인 만큼 그분의 충고를 받아드리기로 했다.

나는 뉴욕에 있는 시동생의 친구인 이상무 박사에게 삼성의료원 의사의 소견과 엑스레이를 보내주면서 도움을 청해보았다. 그랬더니 백병원의 이혁상 박사가 권위자이니 만나보라는 연락이 왔다. 그이에 관한 자료를 들고 백 병원을 찾았다. 이 박사는 자기도 “박 장관님의 경기 후배”라고 하며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때 자기가 담당했던 고 이동진 의원 병세와 꼭 같다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왜냐면 그 분도 평소에 아주 건강한 분이었는데 어느 날 백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내외가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혼수에 빠져있는 이 의원을 보고 오면서 정확한 병명이 무엇이냐고 그이에게 물었더니 “간이 나쁘다는 것 같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작고하신 것이다. 평소 가까이 지내온 이 의원의 병세 원인을 자세히 들었다면 남편도 대장 검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혁상 박사는 “chemoposte를 해서 암세포가 없어지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5년을 넘길 수 없다면서 괜히 이것저것 하다가 몸만 망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결론은 희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길이 없었다.

서울대학 병원의 김노경 박사를 찾아갔다. 물론 모든 자료를 보여주었다. 김 박사도 그이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미국에 가봤자 큰 소득이 없다며 외국에 갔던 환자들도 다시 한국에 되돌아와서 치료를 받는 예가 많으니 김병수 총장이 추천한 세브란스의 노재경 박사에게 맡기라고 했다.

김 박사는 엑스레이와 의사들의 소견서를 보더니 대장암 말기이며 항암치료에 반응이 좋으면 1년 반, 아니면 6개월 정도의 생존이 가능하다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계상의 수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예상은 했으나 앞이 캄캄했다.

김 박사의 비관적인 코멘트를 뒤로 하고 두 볼에 흐르는 눈물도 의식하지 못하고 서울대 병원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70년대 초 바싹 마른 성연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다니던 정경이 떠올랐다. 내 운명이 왜 이리도 박복할까!

▲ 사돈댁과 함께 제주도 여행에서, 행복한 한때

잠시 벤치에 앉아서 신세타령에 넋을 잃었다. 겨우 남편과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연령이 되었는데 남편을 잃게 되다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에 이어, 남편마저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된다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지? 남편의 체중은 72킬로에서 62킬로 그리고 다시 52킬로가 되었으니 그이를 바라볼 때마다 온 몸에 통증을 느껴야 했다.

서울대 병원 당뇨 전문의가 간에 물혹이 있다고 했을 때 CT로 확인을 시켰더라면, 장관직에서 떠난 후 나에게 건강검진을 해보자고 했을 때 남편 말을 듣고 같이 입원만 했어도 되었을 걸, 삼성의료원 건강검진 때 대장내시경만 했었다면,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의 일들을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 이것이 우리의 예정된 운명이었던가?

차를 타고 달릴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사람들을 만날 때도, 늘 콧대가 시큰거리고 눈은 젖어 있었다.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에 연기같이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뿐이었다. 그래도 남편을 살릴 길을 찾아볼 사람은 나뿐이기에 동분서주했다.

김병수 총장이 소개해준 노재경 박사와 이종태 박사를 만나러 세브란스 병원으로 혼자 갔다. 화학약품 치료로 간의 암세포를 적게 만든 후 고주파 열처리(RF)로 남은 암세포를 태워버리는 방법을 쓰겠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어느 환자의 생명을 4년 연장시킨 예가 있었다고 했다. 4년 연장시키는 것이 대단한 업적이나 되듯 말을 했지만 나에게는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기 전 날 우리 다섯 식구가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그이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담담하게 자기 심정을 털어놓았다. 처음에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Why me?(왜 내가?)” “결혼 50주년 기념일은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은데....” 등 아쉬운 생각에 잠겼으나 “이것이 나의 숙명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드리자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했다.

다만 “엄마가 나 없이 혼자 허둥지둥 대고 외로워할 것을 생각하면, 또 그동안 나를 의지해 온 자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나 숙명론자이지만 패배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고 그리고도 안 되면 그것도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겠다고 차분히 솔직하게 말했다.

듣고 있던 아들, 며느리, 손자 할 것 없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며늘아기는 라식수술을 한지 얼마 안 되는데 눈물을 흘려서 혹시 눈에 해로울까봐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애썼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지경이었으나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참아야 했다.

작년 12월 그이 꿈에 부모님, 형님, 김재규 부장, 정일권 총리 등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분들이 다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삼성병원에서는 환한 저택에서 발로 문을 못 열게 막고 있는데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기어코 강제로 들어오셨다는 꿈 이야기를 하기에 “당신을 도와주려고 오셨나봐요”라고 좋은 방향으로 해몽을 해주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