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복수공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청와대에도 당에도 정 의원과 가까운 사람들로 포진되어 있는 상황에서 결과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민정당의 권정달 사무총장과 윤석순 사무차장도 정 후보와는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라고 귀띔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었다.
2월 16일 김천지구는 조직관리상 문제가 있어서 복수공천을 안하기로 결정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우리에게는 일언반구의 연락도 없었다. 언젠가 충고해주던 선배님 말씀이 옳았다.
그때 내 나이 48세였다. 우리 부부는 빚만 없이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돈에 대한 욕심 없이 살아왔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 생전에 처음으로 돈의 위력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남편은 “처자가 없으면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출마를 하겠지만 그럴 순 없어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기위해 복수공천이라도 받기를 원했는데 무산되었고… 군인들이 나를 무소속으로 내몰고 정치생명을 끝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다”고 자기 심정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후보자들 가운데 당신만큼 자격을 구비한 사람도 없으니 10대 선거 때 보여준 수준 높은 김천 유권자를 믿고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자”고 권유했다.
선거는 3월 27일인데 2월 21일에 우리 참모들을 소집하고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선거운동이 늦기는 해도 워낙 인물이 없으니 출마하면 당선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며칠 전에는 권정달 사무총장이 남편을 만나자고 하더니 “민정당 공천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무소속으로 나가 당선이 되면 당에 입당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이미 보고를 했다. 우리가 돕겠다. 정 의원과 같이 내일 셋이서 저녁식사를 하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정당은 도와주지도 않았고 세 사람의 식사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이는 2월 23일에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를 불과 한 달 남겨두고 김천에 내려가 보니 우리 운동원들이 민정당 후보와 민한당 후보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박정수는 정치규제법에 묶여서 출마를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사나 장관으로 자리를 바꾸게 될 것이다"라고 해서 그쪽으로 갔다고 말했다. 막상 남편이 무소속출마를 선언하자 다른 정당으로 갔던 운동원들이 속속 돌아왔다. 일당을 받거나 개인의 부채를 상당액 청산해준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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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유권자들은 중앙정치 내막을 알 길이 없어 객관적으로 볼 때 당연히 박정수 후보가 공천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데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민정당 후보도 민한당 후보도 상주지역에는 관심이 없는지 김천에 모두 몰려와서 명분 없이 5만원, 2만원씩 돈을 돌리고 있었다. 상주는 원래 한 후보를 두 번씩 뽑아주지 않는다는 징크스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원래 상주 출신인 정 후보가 선거본부를 김천으로 옮겨놓았다.
10대 총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심해진 금권 타락선거 양상이 우리의 마음을 잠시 흔들리게 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타락선거를 폭로하고 출마포기 선언을 할 계획도 세웠으나 자기 몸 아끼지 않고 열렬히 뛰는 운동원들을 봐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민정당과 민한당 후보들은 막강한 재력가라는 점에서 만만치 않는 여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합동강연이 시작되면서 판세가 달라졌다. 돈이 생각보다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여당을 공격해야 할 민한당 후보는 오히려 민정당과 제휴하여 무소속인 남편에게만 인신공격을 가했다.
우리는 10대 총선 때와 같이 ‘영국신사’라는 별명을 유지했다. 우리 운동원들이 신들린 것 같이 전력투구하는 모습은 우리의 흉금을 울릴 정도였다. “박정수를 6년 임기로 뽑아주었는데 겨우 6개월 만에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졌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주자” 는 우리 운동원들의 간절한 절규가 먹혀들었다고 본다.
“박정수는 실력은 있으나 돈이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우리한테 돈을 요구하는 유권자들은 많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반전되어갔다. 우리 운동원들은 돈 받고 뛴다는 누명은 받지 않았고 오히려 지역발전과 국가를 위해 실력 있는 인물을 지지한다는 명분 때문에 떳떳해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돈 많은 후보 운동원들은 돈 때문에 뛴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 창피해 하는 것 같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돈이 필요해서 몸은 재력가들에게 가있어도 마음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많았다. 일반 유권자들의 인물평은 정확하다. 지역 어른들은 “박정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고루 갖춘 인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거당일 그전과 같이 그이는 김천에 남고 나는 상주로 갔다. 이번 선거는 뒤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상주는 미처 조직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종친회와 교회만이 동원된 상태였다. 어차피 상주는 배타적인 고을이어서 별 기대는 갖지 않았다. 과연 선거 당일에 투표구마다 다녀보니 우리 참관인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상주에서 표가 나왔다. 특히 상주읍과 함창지역 유권자들의 지지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은 선거 기간 중 우리에게 힘겨웠던 일은 상주의 어느 교회 장로가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그 장로는 사람을 내세워 장로끼리 싸우면 교회표가 분산되니 그동안 자신이 쓴 경비를 주면 출마를 포기하겠노라는 전갈을 해왔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분노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술수를 쓰는데 대한 분개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남편이 알려주지 않아서 모른다.
개표하는 날 밤 나는 또 수면제를 먹고 잠에 빠졌다. 개표상황을 감당할 만큼 담력이 없었다. 모두 잊고 싶었다. 새벽 5시쯤 해서 그이가 나를 깨웠다.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좋아할 겨를도 없이 피곤에 못 이겨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이번에도 여당 후보보다도 많은 표차이로 1등을 차지했다. 우리는 얼굴이 까맣게 타있었고 그이는 체중이 6kg, 나는 3kg이나 빠졌다. 선거가 끝나고 밟아야 할 절차를 다 마친 후 그이를 김천에 남겨두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차안에서, 이범준이 아니라 박정수가 되어 일비일희하며 선거에 몰입하였던, 지난 몇 달 동안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무소속의원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다른 정당 후보들은 일찍이 지역구에서 운동을 해온 데 비해 우리는 복수공천을 기다리다가 겨우 선거일을 한 달 남겨놓고 지역구에 내려갔으니 말이다. 김천 유권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남편 고향사람들의 높은 수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