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와 부산에서 재회 (2회)

9·28 수복 후 시흥에서 서울로 돌아와 보니 언니 집도, 우리 집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안방 벽에는 언니를 좋아한 남학생이 쓴 ‘살아 있느냐’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생사를 알 수 없어 애끓던 애틋한 심정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오빠는 북한군이 곧 남하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자 다시 피난을 결심했다. 두 언니 가족과 함께 일찌감치 부산 행 보따리를 쌌다.

우리가 부산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었던 것은 오빠 덕분이었다. 항공사 신용욱 사장과의 친분으로 비행기표를 살 수 있어서 평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부산 수영으로 가는 비행기안의 피난민들은 모두 겁에 질려보였고 기내가 조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피난길에 너무나도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비행기로 피난갔다는 사실을 숨겼다. 우선 오빠 친구 집에 신세를 졌다. 부산은 집집마다 서울 손님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 이의 피난길

전쟁 발발 후 그이가 어떻게 서울에서 김천까지, 김천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결혼 후 여러 번 들었다. 둘째 형은 연대 영문과, 셋째 형은 서울대 물리학과, 그이는 경기고등학교 학생으로 세 형제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한강 다리가 폭파되고 인민군이 본격적으로 수도에 입성하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이다.

형제들은 폭격기가 날아오면 납작 엎드렸다가 걸었다. 그리고 걷다가 배고프면 남의 밭에서 이것저것 캐서 날 것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남으로 내려가던 어느 날, 산속에서 미군 포로를 앞세운 인민군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싸우지 않고 피난을 가느냐?”며 질책을 했다. 형제들은 “일단 고향에 간 다음에 인민군으로 지원하겠다”는 변명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길을 터주지 않고 “영어를 아는 학생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이가 앞으로 나서자 “우리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통역을 하라”며 트럭을 가리켰다. 그러자 둘째 형이 어린 동생을 보낼 수 없다며 대신 그들과 같이 서울로 갔다.

남은 두 형제는 이 집 저 집에서 끼니를 때우며 형을 기다렸다. 형은 서울로 끌려가는 도중에 운 좋게 도망쳐서 며칠 후 동생들과 합류해서 김천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고향에 도착한 형제들은 다시 부모님과 여동생, 막내 남동생과 같이 부산으로 향했다.

훗날 시어머니는 또 다른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피난 가기 전 동네 사람들을 시켜 당신이 준비해 놓았던 비단과 그릇들을 정원 한쪽에 묻었다는 것이다. 미래 며느리들을 위한 것이었다. 9‧15 수복 후 김천으로 돌아와 보니 그 구덩이에는 비단실 한 오라기도, 깨진 그릇 한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모른다고 모두들 허탈하게 웃었다는 것이다.

부산으로 피난한 나와 그 이

부산에서 기독학생 모임이 재개되면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이는 영어를 잘해서 미 제7 항만사령부에서 행정보좌관 겸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병무청에서 군복무로 인정을 해주었다고 한다. 전시라 그랬는지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세대에 진학했다. 동생의 인연으로 대학생인 두 형들까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때인가는 그 부대 장교들이 한국 국방부에 ‘박 브라더스가 필요하다’는 공문까지 보냈다 한다.

▲ 연세대 재학 시절 / 왼쪽부터 조철화, 박정수, 전영철

그 때 나는 여고 6학년생이 되어 있었다. 교회에서 가끔 만나면서 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 외의 책을 많이 읽었다는 점, 그래서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상식이 풍부하다는 점, 영어 실력도 이미 무척 앞서고 있다는 점 등을 발견했다. 웃기 잘하는 청년이었지만 속은 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츰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연대 천막교사와 경기여고 천막 교사가 공교롭게도 영도다리를 넘어가는 방향에 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도적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우리는 영도다리 앞에서 만나 등교하는 날이 잦아졌다. 어느 날 밤, 둘이 같이 걷게 되었는데 그이가 불쑥 “오빠라고 부르지 그래”라고 하는 것이다. 반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오빠는 무슨 오빠”라고 응답하고 지나쳤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 남선여고에서 있었던 기독학생 모임에 참석했는데 누군가 “박정수가 사귀던 여자친구가 왔다”고 한 여학생을 가리키며 알려 주었다. 우리보다 선배이고 고향이 같은 김천이라고 했다. 그때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이는 반죽이 좋은 편이어서 심심치 않게 우리 집에 놀러왔다. 우리는 바로 위 언니의 애인(후일 형부)이 몰던 지프차를 타고 더블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송도의 구불구불한 길을 드라이브 하노라면 전쟁 중이란 것도, 피란을 왔다는 것도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즐겁기만 했다.

어느 날, 우리 둘 만의 시간을 송도에서 갖게 되었다. 그는 작은 보트에 타라고 했다. 수영을 못해 망설이자 손을 잡아당겼다. 보트에 몸을 싣기는 했으나 겁이 났다. 잠시 노를 저어 가니 작은 섬이 나타났다. 우리는 용감하게도 그 어두운 밤에 섬 기슭에 내려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에 남자를 따라 배를 타고 인기척 없는 섬에까지 갔던 나의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날 우리는 장래를 약속했다. 그이는 19살, 나는 18살! 아직도 철없는 10대였다. 어른들이 알았다면 우리가 불장난 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프로포즈를 하는 순간 속으로 다짐했다. 이 남자에게 단점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고쳐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훌륭한 사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동시에 그에 대한 강원용 목사님의 칭찬도 머리에 떠올랐다. 그런데도 언젠가 남선여고에서 보았던 그 여학생이 마음에 걸려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들었는데…”라고 망설이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해명했다. 그때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때의 내 무신경은 거짓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