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1월 9일 강원용 목사님, 김정례 장관님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말씀드렸다. 전 대통령이 11대 총선 때는 자기가 잘 몰라서 도와주지 못했지만 오는 12대 총선 때는 꼭 공천을 주겠다고 했는데 선거가 다가오니 그 누구도 상상 못했던 다크호스(dark horse)인 대통령의 막내동서 김상구 씨가 공천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이가 출마를 포기 하자 김 씨가 그이에게 김한선 국민당 후보의 표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꼭 무소속 출마를 해주고 낙선하면 자리를 보장해주겠다고 했다는 말까지 했더니 두 분께서는 자신만 있으면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1월 14일 오후 8시 장세동 경호실장이 그이에게 “이번에 출마를 포기했다면 대통령께서 노여워하실 뻔했다. 꼭 출마해주기 바란다. 낙선하면 자리를 보장해주겠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집에 와서 그이는 고민을 했다. 출마를 하자니 대통령 동서와 치열한 대결을 해야 하고 출마를 안 하자니 대통령 의사에 도전하는 격이 되고…
고심 끝에 우리 부부는 김 씨는 대통령의 친인척인 만큼 대통령의 얼굴을 봐서도 모법적인 선거가 될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그이는 무소속 3선 기록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1월 20일 불과 한 달 전에 결혼한 며느리 주영이를 데리고(성우는 조지타운 법대로 떠났다) 김천으로 내려가서 골든 맨션에 임대로 자리를 잡았다. 막상 내려가 보니 기가 막혔다. 순진한 지방 유권자들 가운데는 대통령 동서라고 하니 지역발전에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 후보의 장인인 이규동씨는 “내 사위가 언젠가는 상임 위원장도 되고 국회의장도 되고 차기 대통령도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최다득표를 해야 한다”며 몰표를 호소하며 다닌다는 것이다.
각종 기공식에서 민정당원들은 표가 안 나오면 공사를 중단시킨다고 하지를 않나, 대통령에게 졸라대면 지역구를 위해서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하지를 않나, 시, 군 부녀회장, 계장, 과장 등이 근무는 안하고 시골로 다니며 선거운동을 하지를 않나… 나는 내 귀와 눈을 의심했다. 이렇게 막 나갈 수는 없는데 분명히 김 후보는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장관들이 김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김천으로 속속 내려와서 이것저것 공약을 남발하고 다녔다. 예를 들면 체육부 장관이 상주 공설운동장을 위해 50억을 투자한다는 공약을 했다며 역시 ‘쎈’사람이라 서울의 장관들이 절절 맨다고들 수군거렸다. 그러나 지방 유지들은 국가예산을 어떻게 후보 한사람이 마음대로 주물러대느냐고 개탄하면서도 보복이 두려워서 눈치만 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갈수록 우리 운동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우리 지지자들은 10대 선거 당시 공화당의 탄압은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김천으로 들어오는 톨게이트에 체크 포인트를 만들어놓고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 오는 차는 트렁크 안까지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하는 친구들은 겁이 나서 그냥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우리 아파트 주변에는 형사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어서 모두 발걸음을 끊었다. 내가 각 면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 경관이 오토바이를 타고 뒤를 따르고 다른 면으로 들어가면 그 면의 경관이 릴레이로 따라다녔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지지자들이 제일 많다고 알려진 감천면은 군수가 진두지휘를 했다고 한다. 입구에는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나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후보 부인이 조사대상이면 박 후보가 어떻게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할 수 있느냐! 내가 공산주의자냐! 왜 나를 미행하고 주민증까지 보여주어야 하느냐”며 소리를 쳤다. 그러자 지서장이 와서 “제발 감천면에서 나가달라”고 애원했다.
우리 운동원인 남면의 이정식 씨 집에 갔더니 그 곳에는 형사 두 명이 상주하고 있어서 꼼짝도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열렬한 지지자 임봉순 여성회장 외 몇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선거 후 알아보니 임 회장은 서울 조계사로 끌려가서 선거가 끝난 후 풀려나왔다는 것이다.
여기가 대한민국인가?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주에 가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 왔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 사람은 지서에 불려가서 하루 종일 시말서를 쓰느라고 시달렸다는 것이다. 이재옥 무소속 후보도 자기 고향인 상주에서 선거운동을 못하고, 김천에서는 돼지 잡고 돈을 풀어놓아도 민정당이 저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김한선 국민당 후보를 견제해야 한다는 전략이 박정수 무소속 후보의 표를 견제하는 전략으로 바뀐 모양이다. 특히 교회 표를 깨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드디어 합동연설이 시작되었다. 김천 초등학교에서 그이가 네 번째, 김 후보가 다섯 번째로 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이의 연설이 끝나자 모두 우- 하고 운동장을 빠져나가자 단상에 올라간 김 후보가 떠나지 말고 자기 말을 들어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민정당원들이 “저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이라고 외쳐댔다. 그리고 그날 교회 목사, 장로, 집사들을 회식 대접하고 사우나 대접도 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는 후문이다.
사전에 사람들을 모아 놓은 약속장소에 가면 모두 흩어지고 있거나 아예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도청하는지 경관들이 어떻게 알고 먼저 그곳에 가서 해산시키는 것이다.
10대 선거 때부터 변함없이 우리를 지지해온 다수동의 김종학 씨 말이 이 지역에 탄압이 이렇게 심한 적이 없었다며 무서워서 사람들을 모을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선거 이틀 전 봉산면의 한 교회 목사님은 공산국가와 같은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니 나라가 걱정이라고 개탄했다.
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아무리 김 후보가 당원들의 무지막지한 행태를 모르고 있다 해도 이대로 가면 오히려 전 대통령에게 누가 될 것이고, 또 두 사람을 선출하니까 김 후보는 상주에서 그이는 김천에서 당선되면 그것이 전 대통령이 원하는 바가 아닌가 싶어서 김 후보 부인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어느 유세장에서 이순자 여사와 꼭 닮은 여성이 지나가기에 한눈에 김 후보의 부인임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나는 악수를 하며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그녀는 손을 빼면서 “유권자들과 인사를 해야 한다”며 총총히 사라졌다.
중앙국민학교에서 마지막 합동연설을 마치고 각 후보마다 지지자들에 둘러 싸여 구호를 외치며 행진해 나가는데 오로지 우리 지지자들과 우리 내외만 학교입구부터 수많은 전경들이 앞을 가로막고 봉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평하지 않다며 전경들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그이는 어이없다는 듯 말뚝같이 서있었고 나와 며느리는 꼼짝도 하지 않는 전경들 앞에서 엉엉 울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김천초등학교 유세 이후 대구에서 전경들을 파송했다는 소문이었다. 우리 선거구는 순식간에 경찰국가가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