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우리 집은 안팎으로 참으로 분주한 한 해였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남편의 정치행보가 1년 내내 시끄럽게 전개되고 있는 중에 나는 연초부터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 회장이었던 박경서 박사가 국제정치학회도 여성학자가 맡을 때가 왔다며 역대 회장과 회원들의 서명을 받아 연말 총회에서 나를 추천한 것이다. 근 반세기의 역사를 가진 국제정치학회에서 여성학자로서 회장을 역임한 분은 경기 선배인 김옥렬 박사 한 분 뿐이었다.
여성학자 회장은 아직도 김 박사와 나뿐이다. 내가 선임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박 회장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남녀차별 없이 능력 위주로 판단하며 대단히 열린 사고를 가진 분이다. 그때 나는 총회에서 누구든지 후배학자가 회장직에 출마를 하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무투표 당선이 되었다. 1991년 한 해는 차기 회장으로서 그 다음해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학회 일에 참여를 해왔다.
그 시절에는 학회 회장으로 선출되려면 선거운동에 능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치열한 선거 운동까지 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다행히 경쟁 없이 기회가 주어진 행운 때문에 학회장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3년이 되는 지금 학회에서는 회장 직선제의 폐단을 시정하기로 하고 정관 개정을 꾀하고 있다. 회장자격과 실력은 구비하고 있으나 회장 선거전에서 이전투구하는 것을 기피하는 학자들에게 기회를 열어주자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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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성철 전 경희대 교수(후일 학회장, 국회의원, 주미대사 역임) [출처 ; 한국인간개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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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 학자들의 총집합 단체인 학회를 맡고 보니 제일 큰 문제가 재정문제였다. 그래서 독일로 연구차 떠나야 한다는 경희대학의 양성철 교수(후일 학회장, 국회의원, 주미대사 역임)를 억지로 설득해서 학회 총무를 맡겼다.
양 교수는 내가 다닌 미국 켄터키 주립대학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양 교수의 연구논문이나 세미나 발표 내용이 우수하다고 생각했고 이화여대 첫 대학원 제자 손봉숙 박사(현 민주당의원)의 남편인 서울대 안청시 교수의 추천도 있고 해서 꼭 붙잡고 싶었다.
박경서 교수의 친절한 경험담과 충고에 힘입어서 현대, 포스코 등 기업체를 양 교수와 함께 찾아다니며 모금을 했다. 물론 광고비 명목이었다. 학술 논문집에는 순수 학문지이므로 광고를 싣지 않았으나 ‘학회소식’지에는 광고수주를 통하여 재원을 일부 확보했다. 그 후 내 후임자들도 그 전례를 따랐다.
외국의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재정적인 지출이 생각보다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여성회장이기 때문에 학회활동이 저조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더 많이 노력을 했다. 외국학자들을 초빙해서 국제학술회의와 주제별 세미나도 주기적으로 개최했다.
92년 12월 5일 연례 학술회의와 총회를 마치고 회장직을 승계한 김달중 연대 교수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그런 일은 학회 역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여성이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전임자에 대한 그런 예우는 계속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기를 마치고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볼 때 무엇보다도 전임 회장들이 미처 못 해놓은 비영리 사단법인체 등록을 해냈다는 것을 흐뭇하게 생각한다. 등록한 후부터는 기부금 면세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모금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밖에 학회 정관을 개정해서 Korean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Relations (KAIR)라는 영문표기를 Korean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tudies (KAIS)로 개칭했다.
또 2억3천만 원이라는 학회기금으로 학회 건물로 쓸 오피스텔 구입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재구성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후일 김달중. 이호재 교수들의 노고로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오피스텔은 자연히 구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마도 사회과학분야의 학회가 단독건물을 소유하는 첫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한다.
36년 학회사 발간, 6월 8일 국제학술회의 발표논문을 영문으로 수록한 단행본 출판, 국제정치분야 도서목록 출간 등을 해냈다. 물론 그 뒤에는 양성철 총무이사를 비롯해서 젊은 이사진의 숨은 노고가 있었다. 또한 광고업체 섭외를 도와주고 학술회의 후 리셉션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학회 이사진들의 회식비도 조달해준 남편의 외조도 컸다.
다만 학회활동을 하면서 늘 아쉽게 생각해 온 점은 세미나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실상이다.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런 틀을 깰 방법은 없을까? 노심초사했으나 회장으로 지내는 동안 나 역시 전임자들의 형식을 이어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논문발표를 20분정도, 서너 명의 토론자들의 코멘트와 질문은 10분씩, 답변시간은 5분정도로 이루어지는 격식 속에서 깊이 있는 토론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여비와 체재비까지 대가며 외국학자들을 초빙해도 영어구사에 능하지 않는 국내학자들의 의사표현이 제대로 안 돼 그야말로 요식행위로 그칠 때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국내학자들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 땐 무척 안타까웠다.
한 주제를 갖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자신 있게 언어를 구사하며 깊이 있는 토론을 할 수 있다면! 형식적인 세미나가 아니라 뭔가 얻어내는 깊이 있는 연구 활동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정책대안까지 제시할수 있다면! 그런 날이 오기를 후배학자들에게 기대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