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떠난 그이의 유학 길 (6회)
  제2장 유학과 사랑

1953년 2월 4일, 약관 20세의 나이에 그 이도 부산을 떠나 동경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화물선 Sea Serpent에 몸을 실었다. 전후복구를 위해 유학을 허가하는 정부방침에 따라 유학시험에 합격한 후 국방부의 정식 허가를 받아서 그는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의 목적지는 켈리포니아의 라번 대학교(La Verne College) 였다.

형부는 내가 떠날 때 배안에 날달걀 한 박스를 넣어주더니, 그이 배에도 한 박스 실었단다. 우리는 배 멀미로 그 달걀을 먹을 생각조차 못했는데, 그이는 같이 떠난 친구들과 그 달걀을 삶아 먹으려고 여러 궁리를 했던 모양이다. 물을 끓일 수가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선실의 세면대 속에 달걀을 놓고 온수를 계속 틀어댔다. 다음날 배안이 웅성거렸다. 온수가 다 없어져 세수, 샤워할 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이와 친구들은 미안해서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미국행 여비는 이명하 씨라는 분이 대주었다. 그분은 해방 전 시아버님과 김천, 함경도 북청으로 다니며 수산업을 같이 한 분이었다. 우리가 귀국한 후 시어머님은 그분에게 제일 먼저 신세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둘이서 그 댁에 인사를 갔다. 그 후에도 시어머님은 때만 되면 그분을 찾아뵈라고 챙기곤 하셨다.

강원룡 목사님이 전하는 이명하 씨는 해방 전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김천 황금동 교회 송창근 목사의 생활비도 대주시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해방 후 그 분은 김성수 씨, 조봉암 씨와 같이 활동을 하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조 씨와 함께 투옥된 적이 있었다. 조향록 목사 사모님은 이명하 씨 부인이 바느질을 잘 못해서 가까웠던 우리 시어머니가 수감 중인 이 씨의 솜옷을 해주었다고 했다.
 
결국 그렇게 도움을 받은 이 씨가 감옥에서 풀려나와 재기한 후 그의 유학 여비를 대주셨는데, 우리가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는 그 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라 우리가 은혜를 갚으며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 그 이의 멘토역할을 했던 강원룡 목사 / 사진은 195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는 모습이다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그의 일행 4명은 15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내렸다. 총영사관에서 한 직원이 나와 이들을 맞았다. 그 직원은 유학생들을 주영한 총영사에게 안내했다. 그 자리에서 총영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독립운동을 한 이야기로부터 자기의 관할구역이 미국 땅의 거의 반을 차지한다는 자랑을 했다고 한다.

그는 또 유학중 외국여자와의 결혼은 절대 금물이라는 훈시까지 해주었다. 호기심과 감동으로 총영사의 말을 경청하던 그들 앞에 서류를 든 미국여인이 나타났다. 그러자 총영사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사모님한테 인사도 안하는 실례가 어디 있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황한 그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절을 하고 총영사관을 나서면서 배를 쥐고 웃었다고 한다.

그이가 같이 간 학생들과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이 이름을 부르기에 귀를 의심하면서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경기 동기인 김영식 박사(당시 의학도)가 트롤리 전차를 타고 가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국에 가면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친구를 그 넓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그들은 그날 밤 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었다고 한다.

그는 일행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기차를 타고 가서 제일 먼저 신사복을 사기로 했다. 입고 간 옷이 구호품이어서 크기나 모양은 물론 색깔까지 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드’라는 고급백화점에 무턱대고 들어가 가격도 묻지 않고 감색 양복을 골랐더니 무려 80달러나 요구했다. 수선을 피며 골라 놓고 안 산다고 하기가 미안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값을 치르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총재산 140달라. 무모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그 옷을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입었고, 결혼 후는 물론, 미국을 떠나는 날까지 알뜰하게 입었으니 본전을 빼고도 남은 셈이었다.

라번에서의 첫 날밤은 고국에서 고달픈 피난 생활을 하시는 부모형제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도착하자마자 무조건 공부에 열중하느라고 고향 생각을 할 겨를이 별로 없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아플 때면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학교 식당일, 강의실 청소, 교수댁 정원 잔디 깎기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했다.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에는 각별한 취미가 있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연대 정외과에 입학한 후에도 미군장교 통역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영어만은 자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강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힘에 겨워 무척 고생을 했다는 그의 고백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미국대학에서는 과목마다 읽어야 할 참고문헌이 많고 논문(term paper)도 써야 했다. 책 독후감도 써야 할 뿐 아니라 예고 없는 시험도(pop quiz) 치러야 했다. 그 당시 유학생들은 조금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코피가 나올 정도로 밤새 공부를 해야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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