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일장춘몽 (131회)

퇴원한지 열흘 만에 다시 입원했다. 그는 저 세상으로 떠날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화장해서 성연이 무덤 주변에 뿌리라고 하더니, 성연이 무덤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 납골묘를 성연이 묘 옆에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성연이와 시부모님이 계시는 기독교 공원묘지로 가서 납골묘 유형에 관한 자료를 얻었다. 우선 아들 며느리가 화장이라는 방법을 찬성해야 가족 납골묘가 가능한 것이어서 그림을 보여주며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우리들도 화장할 겁니다.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있게 된다는 생각이 좋아요”라고 했다.

그래도 고민이 되어 미국에 살고 계시는 시아주버님께 전화로 의견을 물었더니 큰집 부부는 이미 병원에 시신 기증 서명을 했다고 한다. 자식들이 몇 번이나 성묘를 하겠느냐는 미국식 사고였다.

다음 날 그이에게 보여 주었더니 세 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를 택했는데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내가 공원묘지에 간 그날 하경근 의원과 이병조 교수가 병실을 찾았던 모양이다. 후일 그 분들은 내가 산소를 보러 갔다는 말을 그이가 태연하게 말해서 놀랐다고 했다. 그 날 그이가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하더라는 말도 전해 주었다. 그 말은 나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던진 말이었다.

1973년에 성연이가 열 살 되던 해 묻힌 열 평의 산소 끝자락에 다섯 평을 사놓았다. 우리 산소 바로 아래 바른쪽으로는 유상근 전 통일부 장관이며 명지학원 이사장님의 묘가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다. 그동안 심어놓은 키가 작은 나무들을 다 뽑아 버리고 유 이사장님 산소와 같이 경계선을 돌로 두르고 잔디만 깔라고 했다. 그리고 앞부분과 아랫부분에 옹벽을 쌓도록 주문을 했다.

나는 일일이 그이에게 보고를 했다. 죽는 날을 기다리는 시한부 남편과 묘지 단장, 납골묘 등을 의논하는 부부는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다 들은 그이는 나를 안아주며 “수고했어. 좀 쉬어”라며 감정의 동요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생을 포기했고 어떻게 하면 자기 죽음으로 인해, 아내가 고생을 덜할 수 있을까 하는 일념뿐인 듯이 보였다. 그러니 나는 더욱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산소 문제가 해결된 데 대해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이었다.

성우가 “아버지는 이젠 정말 불가능하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힘든 모양이다. “납골묘니 화장이니 우리 가족이 아버지의 산소 자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만큼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지만, 정작 의연한척 하시는 아버지는 얼마나 괴로우시겠느냐”고 했더니, 성우는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도 자기가 간 후에 할 일들을 말해주기도 했다. “여보, 사망신고는 당신이 모르니까 신규 아버지(친형제같이 지내는 이영순 전 조흥은행 감사)와 의논을 해. 신규 아버지가 그런 것은 잘 알거든” 뚱딴지같은 말을 하곤 했다.

나는 밤마다 괴상한 꿈에 시달렸다. 무서운 꿈을 꾸고 나면 그대로 누워서 그 꿈을 해몽하느라고 뜬 눈으로 지새웠다.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남편 생각에 눈이 마를 날이 없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오세임이가 남편과 같이 부산으로 기차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마치 나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같이 부러웠다. 사실은 몇 년 동안 주말이면 그이와 같이 지역구인 김천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달리는 식당차에서 점심도 들며 휙 휙 지나가는 바깥 경치를 즐기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때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악취 나는 기차내 화장실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았었다. 행복이 곁에 있어도 행복인 줄 몰랐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가보니 그이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전날 밤 피를 토해서 위 세척을 하는 등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간호사와 간병인이 가족에게 연락하려고 했더니 극구 반대를 해서 전화를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알게 되면 너무 놀랄 것이고 아들아이는 급히 운전해 오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침착하지 못하고 늘 허둥대는 자기 아내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이가 피를 토했다는 말에 나는 다시 긴장했다. 다른 암 환자들 가족으로부터 운명하기 전에 피를 토했다는 말을 여러 곳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 유양수 전 동자부 장관 (필리핀, 오스트리아, 베트남 대사를 지냈다) [출처 ; 산업통산자원부 홈페이지]

날이 갈수록 말을 안 하고 내가 가면 우두커니 쳐다만 보다가 깊은 잠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양수 대사께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다. 그러나 깊은 잠에서 깨지 못하는 그이를 한참 쳐다보다가 돌아가셨다.

그 며칠 전 내가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가 유 대사의 부인 김재화 교수를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만났다. 초라한 내 모습을 들킨 기분이 들었다. 유 대사는 워싱톤 대사관의 무관으로 계실 때부터 알았고 그 후 부인되는 김 교수도 학생시절에 잘 알고 지낸 사이었다. 점잖으신 유 대사 내외를 그이는 존경했다.

어느 날,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불쑥 나에게 “여보, 강원용 목사님께 부탁해줘”라는 것이다. “무얼?” 하니까 “내 장례식 말이야” 하고는 곧바로 잠에 빠졌다. 잠 속에서도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일까? 간신히 우유를 스트로우로 마시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묘지 공사가 끝나면 음식도 안 먹을 거야. 이렇게 살아서 무엇해”하는 것이다.

얼마나 괴로울까? 이럴 때마다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다음 날 또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묘지 공사에 지장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을 하는 것이다. 묘지가 완성될 때 까지만 버틸 모양이다.

3월 12일, 그이가 운명하기 열흘 전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성우가 아버지 손을 잡고 “사랑해요, 아버지” 라고 하니까 눈을 번쩍 뜨고 “응” 하며 눈물을 흘렸다. 강 목사님이 그날 오셨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이를 보고 목사님은 흐느껴 우시면서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라고 말을 잇지 못하셨다.

기도를 하면서 “왜 정수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라며 평상시와는 다른 감성적인 기도를 하셨다. 나도 흐느껴 울었고 목사님이 떠난 후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목사님은 떠나시면서,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혼자 가면 제일 견디기 힘들다고 하니 아들집으로 가든지 아카데미 하우스로 오라는 따뜻한 말씀을 남기셨다.

강 목사님이 다녀가신 다음 날 경동교회의 박종화 목사님이 전도사와 같이 오셔서 통증으로 힘겨워하는 그이를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김천 황금동교회의 장로를 지내셨으니 그 교회 목사님께도 연락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날 김녹영 박사가 그이 혈압이 아직은 정상이지만 혈압이 떨어져도 올리는 일은 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게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