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총회 대표, 1973년
한국문제로 유엔에서는 매년 곤욕을 치루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도 북한도 유엔가입을 위해 엄청난 국력을 낭비했고 남북한의 뒤에는 서방진영과 공산진영이 버티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많은 유엔회원국가의 지지를 획득하느냐가 관건이었고 따라서 제3 세계국가의 표를 얻기 위해 경제적 소모가 크던 때였다.
1973년 11월, 제 28차 유엔총회에 김용식 외무장관이 이끄는 대표단의 고문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국제기구론을 가르쳤던 나로서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유엔총회에는 임영신 전 상공부장관, 김활란 박사에 이어 내가 세 번째 여성대표라는 것이다.
국회에서는 교섭단체별로 공화당의 민병기 의원, 신민당의 정헌주 의원, 그리고 내가 선정되었다. 그밖에 외무부의 대사들과 학계와 언론계에서 여러분이 대표단에 포함되었다.
현지에 가서 보니 남도 북도 비동맹국가들 또는 제3세계 국가들을 포섭하느라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차마 활자화하기 힘든 내용도 있었다. 그런 국가 대표단의 여비를 우리가 대주어야 하고 뉴욕에 도착하면 체제비까지도 내주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철통같이 지지한다고 약속을 하고도 투표 당일에 나타나지 않는 국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비동맹국가 대표들을 회식에 초청한 자리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정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현장이었다.
세계가 동서진영으로 양분된 상황에서는 미・소의 거부권 행사로 남북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따라서 남북한 문제 토의는 실익 없이 영원히 쌍곡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문제에 대한 표 대결을 하지 않기로 유엔정치위원회에서 극적인 합의를 도출해 냈다. 주한 유엔군은 계속 주둔하되 UNCURK는 북한 요구대로 해체하기로 결의를 했다. 정치위원회 결의를 시작으로 결국 소모적인 한국문제를 불상정하자는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제 31차 총회에서 이 같은 불상정 이슈가 본격적인 토의를 거쳐 그 다음해 제 32차 총회에서 그에 대한 결의안이 가결됨으로써 남북 모두 쓸데없는 소모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북한 대표들이 서슬 퍼렇게 행동을 하는 바람에 우리 대표단은 그 누구도 그들에게 감히 접근해서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원래 겁이 많은 나는 처음으로 남편 없이 혼자 떠난 여행이어서 밤이면 호텔방문 앞에 모든 의자들을 갖다놓고 그 위에 물 컵을 얹어놓은 후 취침하면서 일주일을 버텼다. 집으로 돌아오니 화장실 거울에 남편이 립스틱으로 “Welcome home! I missed you!"라고 써놓았다. 그 글을 보고 감동한 나는 모든 피로와 긴장이 일시에 풀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남편은 이제 내 곁에 없다.
국제의원연맹 (Inter-parliamentary Union; IPU)은 세계국가의 입법의원들로 구성된 이른바 정치인의 유엔과 같은 기구이다. 1년에 두 번씩, 즉 봄에는 이사회, 가을에는 총회가 개최되며 전년도에 결정된 주제를 갖고 토론하고 회원국이 발의한 결의안도 통과시키는 곳이다. 냉전시대에는 서방과 공산진영간의 이념분쟁으로 시간을 낭비했으나 오늘에 와서는 국가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개별 국가이익을 증진시키며 홍보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1974년 10월 IPU총회가 동경에서 개최되었을 때 지리적으로 인접 국가이므로 한국에서도 28명의 대표단이 참석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장기영, 김은하, 정헌주, 백남억, 오세응, 송원영, 고흥문, 정일형, 김진봉, 김임식, 정래혁, 김윤하 의원들이 기억에 남는다. 북한은 김득란, 박정실 두 여성대표와 홍기문 단장, 김영남 부단장, 윤기복 등 여러 명이 참석했다.
박준규 대표단장에 의하면 북한이 1973년 처음으로 가입하던 해에 북한의 여성대표가 불어로 유창하게 연설을 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도 여성의원을 대표단에 포함시키자며 외무위원인 나를 선정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여성의원이 IPU총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남성의원들이 나누어 먹기 식으로 교섭단체별로 해마다 교대해가며 대표단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여성으로 혼자 가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아서 백두진 의장에게 일어에 능통한 이숙종 의원도 대표단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드려서 함께 가게 되었다.
동경 IPU총회에서 인권에 관한 연설이 나에게 배정되었다. 북한대표가 연설을 한 직후가 나의 차례라고 했다. 전날에 대충 김병훈 전문위원과 같이 북한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연설문을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그날 밤 아래윗니가 몽땅 흐물거리며 힘없이 빠져버리는 무서운 꿈을 꾸어 기분이 나빴다. 김일성체제를 비판한다고 테러나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