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순방과 구미(歐美) 순회 ...

1976년 봄, 세계반공연맹총회(WACL)가 한국에서 개최되었다. 문공위원으로 참석한 나는 그 산하의 청년반공연맹 (WYACL) 총회에서 20개국을 대표하는 80여명의 지지로 의장에 피선되었다.

세계청년반공연맹 의장 피선과 중남미 순방

그 더운 8월에 중남미 회원국 초청이 있어서 의장 자격으로 반공연맹의 사무총장인 우재승 박사 일행과 같이 중남미 회원 국가를 방문했다. 학계 대표, 교포 유지들을 만나서 의견교환을 할뿐 아니라 강연도 하고 한국대사관의 협조를 얻어 국회의장, 외무위원장, 그밖에 각 나라의 영향력 있는 의회 지도자들과의 면담시간도 가졌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해서 니카라과, 과테말라,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순으로 5개국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한국의 태권도 사범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니카라과의 소모사(Somoza) 대통령 사무실에는 우리 사범이 자기 사무실 드나들 듯 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우재승 박사와 같이 소모사 대통령을 방문하고 국제회의에서 한국을 지지해주는 니카라과 정부에 대한 감사를 표명했다. 방문하는 국가마다 그 지역 지진이나 재난을 당했을 때 한국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해준 데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았고 한국의 경제발전에 모두 감탄했다. 우리나라가 어느덧 국제사회에서 원조국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장내를 가득 메운 멕시코 대학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강연을 한 것도 무척 의의있는 시간으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때만 해도 중남미 국가는 공산 게릴라 활동에 신경을 써야 했고 좌우간의 갈등이 심각하던 시기였다. 우리교포들도 생각보다 기반을 잡고 잘 살아 흐뭇했다. 한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모두 친한파가 되어 그동안의 정부의 초청 외교가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5개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코스타리카 한국 대사들의 능력에 감탄하고 돌아왔다. 방문 일정을 급히 연락했는데도 불구하고 콜롬비아의 옥만호 대사는 그 나라 외무위원장 등 의회 지도자들을 부부동반으로 관저에 초청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옥 대사 사모님의 테이블 차림, 식단 모두가 외국손님 초청에 너무나 완벽해서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짧은 기간에 유력한 의회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는 솜씨는 평상시에 외교관들이 얼마나 그들과의 친분을 쌓아왔느냐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도 된다.

코스타리카에서도 마찬가지 경험을 했다. 당시 이복형 대사(현재 중남미문화원장)는 우리 일행의 방문일자를 더 촉박하게 알렸는데도 그 나라의 유력인사들을 관저에 초청해서 가족적인 분위기의 만찬행사를 가졌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사람이 후일 대사로 한국에 부임해서 우리 부부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중남미 나라마다 회의가 끝나고 만찬에 초청 받아 가면 칵테일 파티가 몇 시간 계속되고 저녁식사는 밤 10시에나 시작되어 배가 고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늦은 만찬이 끝나면 시를 읊거나 사교춤을 추면서 인생을 즐기는 모습도 신기하게 보였다. 의외로 영어 구사능력도 한국보다 대단했다.

그 해 여름 방학 동안 남편은 정부의 대미외교 임무를 띠고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 때도 닉슨 독트린으로 이미 주한미군의 일부를 철수시킨 일이 있었지만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 역시 주한미군 감축을 주장하고 나왔다. 정부는 주한미군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다각도로 미국 의회를 설득하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중남미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L.A.에서 남편과 아들을 만나고 올 계획을 세웠다.

▲ 세계청년반공연맹 의장 선출

그러나 중남미로 떠나기 전 당직자들에게 출국인사차 갔을 때 그들은 “절대로 워싱턴에 가서 남편을 만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어 볼 수도 없고 해서 나 나름으로 해석해 보았다. 공인이 해외에서 부부가 만나는 사치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고 그럴 경우 나에게 불이익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귀국길에 아들을 보러갔고 그 시기에 맞추어서 남편도 그곳에 와 있었다. 이틀을 같이 보내다가 돌아와서 마치 죄나 지은 듯 고개 숙이고 다니던 그 시절이 지금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정치풍토의 시대적 차이를 이런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국회의원 임기 6년 동안 내내 당직자들의 휘하에서 유치원 학생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부부가 해외에서 만나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유치한가? 그런데도 그런 사고가 그 시대를 지배했던 것이다.

구미 순회 강연

외무위에서 문공위로 교체되면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없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중남미 5개국을 순방한 다음 해 77년에도 국회 문공위원 자격으로 구미국가 6개국(그리스, 영국, 스웨덴, 벨지움, 프랑스, 미국) 순방을 하게 되었다. 연초에 이미 미국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개최된 세계반공연맹 총회와 대만의 세계자유의날 행사에 연사로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스와 영국, 스웨덴까지는 문공부 예산으로 순회공연을 하는 우리 예술단을 수행했고 나머지 3개 국가는 나 혼자만의 강연계획 때문에 방문했다. 미국은 자고리아 교수를 비롯해서 콜롬비아 교수들의 오찬 강연초청을 받아서 가게 되었다. 김성진 장관이 문공위원인 나의 구미 순방외교계획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정회 총무단이 극구 여행을 말리면서 특히 미국여행은 당분간 금지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여행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 장관과 청와대 유혁인 수석이 한미 연례 세미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총무단을 설득해서 출국이 가능해졌다.

강선영 씨가 이끈 한국의 전통무용단은 가는 곳마다 대환영을 받아 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무척 자랑스러웠다. 벨지움에 도착하니 안광호 대사가 때를 잘 맞추어서 왔다며 환영했다. 벨지움 문화부장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양국간 문화교류협정 체결에 합의를 해놓고도 시간을 끌고 있으니 국회 문공위원 자격으로 그를 만나서 조기타결을 부탁해 달라고 했다. 문화부 장관과의 대담에서 외무부의 입장을 전달하면서 호의적인 반응을 받아냈으며 그 후 얼마 안 가서 성사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또한 떠나기 전부터 초청받은 왕립국제관계 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Relations) 주최 세미나에서 한국의 통일과 안보에 관한 강의를 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도 했다. 뉴욕에서는 자고리아 교수 행사를 마치고 대외관계위원회(Council of Foreign Relations) 주최 오찬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에 대해 발표를 하고 토론도 했다.

20일간의 여정인데 하루도 쉬지 않고 3일마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연설문도 손질하는 등 신경을 많이 쓰는 여정이었다. 뉴욕에서의 발표는 반응이 특히 좋았고 브뤼셀에서의 연설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영광이었다. 국회 폐회기간 중에 나로서는 많은 일을 하고 왔다고 자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