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법 개정을 위한 운동이 시작된 지 거의 5년 만에, 법사위에서의 제안 설명이 있은 지 2년여 만인 1977년 12월 17일 9대 정기국회가 폐회되는 날 개정안 수정안이 졸속으로 통과되었다.
결국 호주제 폐지와 동성동본 금혼제 폐지는 손을 대지 않고 이혼시의 재산분배 문제와 상속에 있어 처와 딸의 상속비율을 조정하는 등 사회적 저항이 적은 일부만을 개정했다. 동성동본 사실혼부부 사이에 이미 태어난 자녀 입적에 관한 특례법을 만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주: 상세한 내용은 이태영저 ⌜가족법 개정운동 37년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출판, 1992년, pp. 209-211 참조).
가족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은 철저히 소속정당의 당론에 의해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 개정안을 반대하는 여당의원도 찬성했고, 개인적으로 개정안을 찬성하는 야당의원도 반대를 해야 했다. 78년 선거에 대비하여 여당은 여성표를 의식하고 지엽적인 개정이라도 통과시키자는 입장이었고 야당은 개정안을 전면 반대한다는 당론을 결정했던 것이다.
딸을 많이 낳은 야당의 송원영 총무는 시대변천을 감안해서 개인적으로 찬성한다는 의견이었고 정헌주 전당대회 의장은 당론으로 정하지 말고 각자 소신에 맡기자고 주장했다. 김명윤 의원은 개정안이 통과되면 인간이 금수와 다름없다고 하며 ‘가축법’이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반대하여 여성들의 빈축을 샀다. 야당의 두 여성의원들은 당론을 어길 수 없다고 하여 고민 끝에 기권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4년간 남성의원들의 농담 혹은 비아냥 꺼리가 되어왔던 가족법이 중요한 조항은 빠지고 지엽적인 부분만을 개정하게 되었다. 이에 여성의원들과 여성단체들은 실망했으나 “첫술에 배부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변화를 가져온 데서 의의를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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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사위원회에서 가족법 통과 직후 / 법사위원장과 여성 의원들 (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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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무의미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개정운동을 이끈 이태영 박사는 ”1962년 법정분가제도가 채택된 이래 20년 만에 처음으로 손질을 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논평했다. 온갖 허무맹랑한 비난을 감수하며, 자나 깨나 가족법 개정을 관철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고생한 이숙종 의원은 정작 병원에서 개정안 통과소식을 듣게 되어서 가슴이 아팠다.
확인할 길은 없었으나 그나마 국회가 폐회되는 날 본회의에서 통과 될 수 있었던 것은 박근혜양이 아버지를 설득해서 막판에 성사가 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원외의 범여성단체 개정촉진회의 열렬한 지원사격과 9대 국회 여성의원들의 노력으로 가족법이 개정되었으나 이에 대해서 너무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쉽다. 시작 없이 어떻게 결과가 있겠는가. 이날 통과된 수정안은 ‘시작이 반’이라는 그 시작이었음에 틀림없다.
9대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11명 여성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가족법 개정안을 공약했던 나의 초지와는 다른 형태로 막을 내렸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남성들의 의식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실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숙종 의원이 앞장서 주었고 정열적인 이태영 박사의 원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성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역대 여성의원들과 이태영 박사가 이끄는 여성단체연합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1989년 12월 19일 호주제의 완전 폐지 조항과 동성동본 금혼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조항이 개정되었고 2005년에는 올해 2005년에는 호주제도까지 폐지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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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영성운동의 대모, 이태영 박사의 활동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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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법 개정운동을 해온 과정에서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수정안이 통과되기 전날 본회의장에서 신민당의 정헌주 의원이 나에게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겠다며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2대 국회 때 정 의원과 윤길중 의원이 동성동본 금혼을 반대하는 가족법 개정안에 찬성했으나 정작 여성의원인 박순천 여사가 개정을 반대한 결과 27만 명의 사생아가 생겼다는 것이다.
가족법 개정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여성의원 집으로 이상한 내용의 편지를 계속 보냈다. 나에게는 ‘기껏 국회에 들어가서 겨우 동성동본끼리 결혼시키겠다는 일에 앞장 섰느냐’는 내용의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이숙종 의원께는 ‘동성동본과 결혼하고 싶어서 동성동본 금혼제를 폐지하려느냐’ ‘당신 집을 폭파시키겠다’는 내용의 엽서가 계속 날아들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