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도 읽지 못하고 두메산골로 다니며 사조직 운동원들을 만나고 밤에는 냉방장치도 없는 후진 여관에서 지친 몸으로 고생하는 남편, 아무 죄도 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변명도 못한 채 초죽음이 된 나의 비참한 신세를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5년 전 딸의 죽음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시련으로 알았는데 이런 억울하고 망신스런 누명을 뒤집어쓰다니...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나?
남들은 언제고 누명을 벗으면 될 일 갖고 왜 그리 비관하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동안 지켜온 가치관과 자존심이 완전히 꾸겨졌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한편 비가 온 후 땅이 굳어지듯 이 시련이 지나간 후 더 큰 기쁨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즉, 남편이 공천을 받아 당선만 된다면 이쯤의 시련은 참자고 스스로를 달래보기도 했다.
오제도 의원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다. 국회의원도 조사를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검찰청에서 연락이 갈지 모르니 너무 놀라지 말고 서류준비를 해놓으라는 것이었다. 7월 7일 프레지던트 호텔 23층 11호실로 갔다. 공화당의 박삼철 의원이 조사받고 나온 후 내 차례였다. 도태구 부장검사와 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갖고 간 서류(타워맨션 매매계약서, 구현대아파트 전세계약서, 새 아파트 계약서와 불입금 영수증과 아파트 구조변경 신청서)를 대조하며 조서가 끝났다. 도 검사의 표정이 쓸데없는 말은 안 통할 것 같은 엄격한 표정이어서 짧게 설명하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이성근 의원이 사표를 내야 할 것 같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사실은 나는 이미 권효섭 의원에게 사표를 보낸 후였다. 오로지 남편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만이 나의 관심사였다. 사람들이 내용도 모르고 신문만 보고 오해할 생각을 하니 괴로웠지만 남편이 당선되어서 등원하는 날 “나는 이날을 위해 살아왔다”고 말하리라고 생각하니 고통이 덜어지는 듯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 선배 언니는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면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싶을 텐데 여전히 남편을 국회에 보내고 싶다니 참 집념이 강한 여자”라고 했다.
7월 8일 백두진 의장으로부터 자택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기사가 퇴근한 후여서 택시를 잡는데 30분이나 걸려서 겨우 합승을 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젊은 여자가 “선생님, 저는 이대 졸업생인데 여성과 정치를 선생님께 배웠습니다”고 했다. 온 세상이 아파트사건으로 뒤덮인 줄 알았던 나는 또 무슨 말이 나오나 겁이 났는데 이어서 “오늘밤 제가 운이 퍽 좋았네요.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고.....”하는 것이다. 훈장으로서의 보람을 오랜만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백 의장과 이효상 의장이 박 대통령을 만나서 두 명(이범준과 김진복)은 현재 전셋집에 살고 있는 실수요자라는 점을 보고하니 대통령께서 “공정하게 하라”고 했다는 전갈이었다.
7월 11일 아침 남편이 오랜만에 김천에서 서울로 왔다. 그동안의 긴 이야기를 단숨에 설명을 하다가 그만 울어버렸다. 혼자 겪은 일들이 나에게는 무서운 짐이었나보다. 내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첫마디가 “무엇을 걱정해. 그까짓 것 출마 못하면 그만이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두려워해,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그렇게 마음먹으니까 뱃속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수가 있었지. 당신을 위해서 일찍 귀경하고 싶었지만 이미 짜여진 스케줄을 취소하면 큰일이나 생긴 것으로 오해할 것 같아서 못 왔어”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아닌 듯 말은 하지만 그의 가슴도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기분은 한결 밝아졌다. 이때 남편이 얼마나 든든하고 푸근한 존재인가를 실감했다.
그는 “지금 김천, 상주(당시는 중선거구) 분위기는 아주 좋고 지지도도 올라가고 있는데 당신이 쓴 ⌜엄마가 없는 너의 천국엔⌟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돌아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어 “성연이가 나를 위해 죽은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젖어 있었다. 나는 목에 통증을 느끼며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실은 그날 새벽에 성연이가 내 꿈에 보였다. 지난 5년간 성연이는 꿈에서 한 번도 웃지 않고 멀리 사라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분홍 한복을 입고 한국 춤을 추며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저고리를 매만져 주다가 깨고 말았다.
현대아파트 사건은 옥석을 가리기도 전에 명단을 발표하고, 언론은 전체를 죄인으로 몰아붙여 무고한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한 사건이었다. 조사 후 실수요자의 명단은 신문 한 귀퉁이에 내주어서 잘 나타나지도 않았다. 여론재판으로 남의 명예를 짓밟고 고통을 준 후에 명단이 발표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 와중에 이성을 갖고 객관적으로 쓴 신문기사는 단 한건뿐이었다. 그것은 조선일보의 선우휘 주필의 글이었다. 그는 ‘외국인이 이해 안 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죄가 되는 비참한 현실’을 비판하고 ‘자기가 안 걸렸다고 돌 던지는 사람도 언제 어떻게 걸릴지 모르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온통 싸잡아서 무서운 여론재판이 한참일 때 그러한 글을 쓴다는 것은 용기 가진 자나 소신파가 아니고는 힘든 사회 분위기였다.
그때 투기를 목적으로 여러 채씩 분양받은 사람들과 실수요자를 싸잡아 범법자로 몰아붙였듯이 얼마 전 만두사건도 이와 유사했으리라 생각된다. 오죽 억울하면 여론재판에 굴복하고 한강에 투신자살로써 항변을 했을까. 무심코 발표하는 공무원이나 신나게 써대는 언론인이나 본인의 일이 아니라고 옥석을 가리지 않고 마구 공격하는 일은 앞으로 지양되었으면 한다.
서강대 김인자 교수는 사건 당시 미국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범준 의원이 집장사를 해서 집을 여러 채 갖고 있단다” “남편 선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이사를 자주 한단다”는 등 터무니없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전했다. 참으로 황당했다.
7월 21일 백성배 비서관이 무슨 서류를 들고 왔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현대아파트를 해약한 서류라고 했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우리처럼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정희경 씨, 함병춘 씨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수요자로 판명이 난후에 해약한 사람은 아마도 우리뿐일 것이다.
남편은 전 국민이 저주한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나와 전혀 의논도 없이 아파트를 해약하고 지역구로 내려갔다. 졸지에 집 한 채가 날아간 순간이었다. 그 후 방배동에서 몇 년을 전세로 살아야 했다.
1978년 7월 한 달은 나에게는 지옥과 같은 날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