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남편 박정수를 대사 감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윗분들은 대사로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추천을 했으나 웬일인지 본인이 극구 사양했다. 자기는 한국에서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귀국 후 남편의 은사인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가까이 지냈다. 그분이 단순히 남편의 중학교 선생님이라고 해서만 아니라 그분의 강직하고 곧은 성품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건설부장관으로 부임한 김 장관은 중동지역에 한국 노동자를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항상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이 국민대학 교수로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 박사의 능력을 적재적소에서 활용을 못하고 있는 이 나라 현실이 너무나 아쉽다”며 “박 박사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웬일인지 대통령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유정회 2기 명단에 박 박사를 추천해도 성사가 안 되면 3년 후의 출마를 준비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주었다. 권오태 의원에 대해서도 김 부장이 대통령에게 추천을 했는데 별 반응이 없어서 무소속 출마를 해서 당선이 되고 나니 몸값이 올랐다는 예를 들어주었다.
1976년 2월 남편은 국민대학을 그만두고 건설부 국토조정계획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물론 김 장관의 권유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언제고 출마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서서히 지역구 다지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그이는 김천ㆍ상주로 내려갔다.
한편 1977년 말 김 장관은 중앙정보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신형식 공화당의원이 건설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김 장관이 정보부장이 되기 직전의 일로 기억된다. 정보부의 3국장이라는 분이 만나자고 해서 백남빌딩 1719호실에서 정보부에서 왔다는 두 사람을 만났다. 침대가 있는 방이어서 불쾌했지만 내색은 안했다. 이 자리에서 정일권 의장과 김종필 총리와의 관계, 오정근 의원과 김진봉 의원과의 관계를 물었다.
내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안다고 난데없이 그런 질문을 하는지 그 동기를 알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어리석은 주문까지 했지만 집에 와서 그대로 말해주고, 3국장에게도 미안하지만 남편에게 알렸다고 전화로 말해주었다.
정일권 총리 밑에서 특별보좌관으로 일한 죄밖에 없는데, 그것도 국내정치가 아니라 외교 분야에만 종사해 왔는데, 그것이 남편의 출세를 막는 요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재를 능력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누구의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풍토라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왜 그분들에 대한 정보를 굳이 나에게서 얻으려고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모르는 정치인들 간의 알력이 있다는 짐작은 했고 남편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희생양이 되어왔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78년 2월 11일 신형식 건설부장관이 차관을 시켜서 느닷없이 그이에게 사표 낼 것을 종용했다. 우리는 7월경 사표를 낼 계획이었으나 5개월 먼저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그이는 속은 몰라도 겉으로는 너무나 태연했다. 소문에는 백남억 의장이 신 장관에게 김천에서 출마준비를 하는 박정수를 왜 국토조정위원회에 그대로 두느냐고 역정을 내서 부득이 그런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히 신 장관을 만났을 때 그 분은 나에게 “전화위복이 될 겁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경기 선배인 신 장관은 평소에 우리와는 원만하게 지내온 사이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를 했다. 박준규 의원은 나에게 “박 박사가 백 의장의 지역구인 김천에서 출마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서울에서 출마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백 의장이 조금만 현명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965년 말 우리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을 때 박정수가 김천에서 출마할 생각으로 지역구를 다지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런데 그분은 남편의 행정부 진출도 막고 출마도 원천 봉쇄하려고 했다. 고향의 젊은 후배가 정계에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가 그 지역을 계속 장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선배로서 후배가 행정부에 진출하도록 도와주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랬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자기를 도와준 고향선배를 배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너무 목을 조르니까 제3자들이 무모한 짓이라고 말리는 무소속 출마를 감행하게 된 것이다.
직장이 없어졌으니 남편은 선거구인 김천·상주에 내려가서 상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12ㆍ12 총선 훨씬 전에 사조직을 만드는 데 충분한 시간을 벌 수가 있어서 신 장관이 말한 대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나는 서울에 있으면서 공천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여기저기 알아보는데 시간을 보냈고 국회에 회의가 없을 때만 지역구로 내려가서 여성 지도자들을 만나고 각 면으로 다니며 우리를 알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다행히 우리 부부의 사진을 실은 달력과 내 책이 홍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