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친구들은 “박정수가 돌았다. 정신 이상이 아니고는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공화당의장을 지내고 대통령 상임고문이라는 거물과 싸우다니...”라며 의례히 낙선될 것이라고 동정어린 눈으로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만 해도 백 의장 정도의 거물급이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의례히 우리가 패배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정선거, 관권선거, 금권선거를 획책해도 유권자의 압도적 지지가 있을 때는 별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제10대 총선결과 무소속 초선의원이 거물을 꺾고 승리한 김천지역이 톱 뉴스중의 하나로 전국의 관심을 끌어 어서나 화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후지 텔레비전을 비롯해서 인터뷰 신청이 쇄도했다.
남편은 당선 직후 승용차에 확성기를 달고 김천시, 금릉군 15개면, 상주읍과 17개면을 돌면서 당선감사 인사에 며칠을 보냈다. 당선 증명서를 김천 선관위에서 받은 후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경부고속도로의 상행선을 달리면서 마치 온몸에 붕대를 감은 승전 장군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언비어, 중상모략, 관권선거, 금권선거 등 온갖 장애요인들을 용감하게 물리치느라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웠기 때문이다.
전문분야별로 구성된 유정회 의원들이 나를 포함해서 지역구 의원들을 어느 정도 경시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거를 경험한 나는 역시 지역구 의원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래서 지역구의원들이 당당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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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씨 8군사령관 내외와 함께 / 배씨 장군 관저에서 당선축하 파티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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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에서 남편이 압도적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 현역의원의 지역구관리 소홀, 둘째 새로운 인물을 희구하는 유권자의 심리, 셋째 현역의원에 대한 공무원의 이반 현상, 넷째 교회의 적극적인 지지, 다섯째 탄탄한 사조직의 힘(이번에는 꼭 바꾸어보자고 작심한 운동원들로 구성), 특히 우리는 마을에서 존경받고 신용 있는 인물을 발굴했기 때문에 사조직이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여섯째 여성운동원의 헌신적인 활동(여성팬이 많았다. 대부분의 새마을 부녀회장들이 은밀히 우리 운동을 했다. 여성 운동원들 대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남성들보다 정직하고 적극적이며 지조가 있었다)을 지적할 수 있다.
위의 6가지 요인이 없었다면 관권, 금권 선거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워낙 자금이 달려 합동연설에서 “주면 받고 찍기는 능력 있는 5번을 찍어달라”고 호소했다. 받지 말라고 하면 농촌 유권자들은 싫어한다는 참모들의 의견에 따라 받으라고 한 것이다. 몇몇 면에서는 우리 운동원들이 여당 운동원들에게 여당 후보 측에서 돈을 주면 받고, 막판에 박정수를 위해 쓰라고 설득한 곳도 있었다고 들었다. 이런 일은 운동원들이 존경받고 어느 정도 연령이 있는 인물일 때 먹혀들 수 있는 방법이다.
기업인들은 여당의 거물후보로부터의 후환이 두려워서도 우리를 공개적으로 지원해 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선후배 동창들, 제자들, 중소규모의 사업가 친구들이 중심이 된 소액 지원금이 선거자금의 주축을 이루었다. 박정수는 돈이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애당초 유권자들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우리 선거구민들의 수준은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여성운동원들이 모여서 자기들이 겪은 고초에 대해 털어놓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김천선거 역사상 그렇게 자기 몸을 던져가며, 한 후보를 위해 여당의 무서운 감시를 피해가면서 헌신적으로 운동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후보 부인이라고 해서 더욱 감시를 받은 나는 끝까지 수행해준 이성희 여사와 함께 밤이면 사조직 모임에 전지를 들고 마치 간첩이 숨어서 활동하듯 움직였다. 시골 밤길 돌 뿌리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고 개에 쫓기기도 하면서 마을 사랑방 모임에서 박정수를 당선시켜야 할 당위성에 대한 연설을 하느라고 나중에는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공화당 강제입당
79년 봄 남편의 초선 임기가 시작되었을 때 공화당은 의회 내 안정 의석을 만들기 위해 모든 무소속을 강제로 공화당에 입당시켰다. 공화당으로부터 받은 푸대접을 잊을 수 없었던 남편은 마지막까지 무소속을 고집했다. 우리를 아끼고 늘 도와주던 김재규 부장의 종용이 여러 번 있었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화당에 입당한 무소속 의원 명단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김 부장이 여러 번 전화를 하셨다. 남편은 “정말 큰일났어. 나를 싫다고 한 공화당에 내가 왜 이제 와서 입당을 해야 하나? 그런데 자꾸 자기를 봐서 입당을 결심해 달라고 하시는거야”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통의 전화를 직접 받은 후 “김 부장의 입장이 몹시 힘드시나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공화당사로 떠났다. 결국 그이는 압력에 못 이겨 공화당에 입당한 마지막 무소속 의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외무위원회와 예결위원회에 배정되었고 공화당의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