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나는 9대 국회 임기를 마치고 남편은 1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나는 곧 다가올 남편의 선거운동 때문에 당분간 취직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하루는 신민당의 최성석 의원이 전화를 했다. “이범준 의원을 문공위에서 겪어보니 야당 못지않게 신랄한 대정부 질의하는 것을 보고 존경하게 되었다”면서 김대중 총재와는 20대 때부터 친밀한 사이라면서 학교로 가지 말고 신민당으로 출마하는 것이 어떠냐고 타진하는 것이었다. 흔히 야당의원들은 전투적인 인상을 주는데 최 의원은 평소에 말이 없고 점잖으신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전화까지 해준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지역구 출마는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정계나 행정부에 진출한 교수들이 뒤에 대학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생겼다. 김숙희 교육부장관은 이대 복직을 대통령으로부터 확약 받고 장관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실무 경험자들을 대학으로 스카우트하는 추세인데 반해 유독 우리나라만 교수 출신 정치인이나 각료들을 죄인시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 경험이며 학생들 가르치는데 보탬이 될 텐데도 타부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미국의 경우 키신저, 브레제진스키 박사도 백악관과 국무성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학자들이다.
남녀공학 대학에서 제의가 왔지만 여자대학이 나에게는 적합한 것 같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회의사당 로비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국회의원인 남편 따라 나도 참석했다. 이규호 문교부장관이 그곳에 계시기에 다가가서 성신여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이장관은 잘 알고 있다고 하더니 갑자기 곁에 서 있던 이숙종 박사에게 “만일 성신여대가 종합대학이 되면 이범준 의원을 총장으로 모셔갈 수 있습니까?”라고 예상하지 않았던 말을 던졌다.
사실은 그 전부터 이숙종 박사가 나에게 성신여자 사범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데 “박 의원님의 힘을 빌릴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은 바 있었고 그이가 이 장관과 친한 분들(조향록 목사, 강원용 목사, 이동원 장관, 김경래 장로 등)을 동원해서 여러 번 만나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때 이숙종 박사는 “여부가 있어요. 남성 의원들은 임기를 마치고 여기저기 자리를 얻어서 일하게 되었는데 여성의원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응수를 했다. 그 장면은 내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순간이었다. 왜냐면 나의 앞날과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숙종 박사의 부탁을 받고 문공위의 야당인 신상우 의원의 도움도 청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를 볼 수 없지만 당시의 국무위원들은 상임위의 야당의원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종합대학 승격운동을 전개한지 근 2년 만에 성사가 되었다.
그 직후에 이숙종 박사가 나를 부르셨다. “미안한 말이지만 초대총장직은 나와 수십 년간 동고동락해온 조기홍 학장에게 안겨드리고 싶으니 이 박사는 그 다음에 하면 되지 않겠어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분과 조 학장과의 관계를 잘 아는 터라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대학마다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이 시위 주동자들이라고 해서 정외과 신설이 어려운 때였지만 나의 전공인 정치외교학과가 신설되었으니 일단 정외과 교수로 82년 3월 학기부터 근무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개학전인 82년 2월 이스라엘에서 개최되는 여성지도자회의에 참석하러 간다고 떠났다.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장은 경비가 삼엄했고 소지품 수색이 무시무시했다. 일단 도착하니 평온했고 성서에 나오는 역사적 유적탐방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세계 각국 여성 대표들의 활기차고 당당하고 야심에 찬 모습에 놀랐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귀국했다. 그리고 곧 성신여대에 부임했다.
이 장관의 배려에 대해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성신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그 뒤를 이어 세종, 덕성, 상명, 서울여대 등이 줄줄이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처음 약속과는 빗나갔지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학생들을 가리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 하나로 만족했다.
그 후 이규호 문교부장관 내외, 이동원 전 외무장관 내외, 우리 부부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이 장관은 “나는 이 박사가 성신여대 총장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해서 그저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을 피했다.
이숙종 박사는 나를 볼 때마다 빗진 분같이 미안하셨는지 늘 “때가 올꺼예요” 혹은 “이 박사를 이사로 추천하려고 해요”등의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학교에서는 내가 총장이 되려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났고, 오래 복무한 교수들은 나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순진한 나는 그런 것도 너무 늦게야 알게 되었다.
성신여대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시어머님은 “이번에는 학생들 성적도 너무 박하게 주지 말고 케이크라도 들고 오면 돌려보내는 일은 하지 말아라. 이대에 있을 때 네가 너무 학생들의 호의에 야박하게 굴 때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하셨다.
82년 초, KBS의 이청수 정치부장 (현재 관정교육재단 상임고문)의 섭외가 들어왔다. 매일 아침 뉴스도 전하고 생방송으로 그때그때 시사문제와 관련된 장관을 전화로 연결해서 대담도 하는 프로를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강용식 보도본부장 (후일 국회의원, 사무총장 역임)의 부탁이라고 했다. 이미 나이가 들어서 화면에 이상하게 비칠 것 같다고 했더니 아직은 괜찮다는 것이다. 그때 내 나이 49세였다.
그래서 이숙종 학원장에게 허락을 맡으려고 말씀을 드렸더니 뜻밖에도 완강히 반대를 하며 학교일에만 몰두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스컴에 나갈 기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것만큼은 한번 해보고 싶었던 분야였는데 지금도 좋은 기회를 놓친 데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