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이화여대에서 학생을 가리킬 때와는 달리 6년간의 현실정치를 경험한 나는 정치학 강의내용이 이론 일변도의 강의에서 탈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인지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변했다. 이대에서는 낙제점수를 주고도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공부 안하는 학생들에게는 가차 없이 박한 성적을 주어서 성적이 박한 교수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성신에서는 시험지 채점을 하는데 낙제점수(F)를 준 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특히 졸업반 학생의 경우는 그 학생을 불러서 다른 과제물을 줘서 최하의 성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역시 대학뿐 아니라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연령대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경험과 경륜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미국 신문에 취업광고에는 반드시 ‘경험필수’라는 글귀가 들어있는가 보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생들에게 나에 대한 평가를 무기명으로 써내라고 했다. 여러 가지 바라는 점들이 열거되었지만 한 가지 위로받은 점은 거의가 모든 학생들이 “교수님의 정열적인 강의…”라고 쓴 대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몸이 아프다가도 강의실에만 들어가면 기운이 솟아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욕심 없이 학생들 가리키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나를 오해하는 교수들 때문에 수난을 당해야 했고 그럴 때면 너무 슬펐다.
82년, 83년 계속해서 학생데모가 끊기지 않을 때였다. 나는 집권과정의 정통성이 결여된 “전두환 대통령은 물러가라”는 구호보다도 학생들의 친북논리에 놀랐다. 그 와중에 시위에 앞장선 사회대 학생회장과 토론시간을 자주 가졌다. 그렇게 북한이 좋으냐는 나의 질문에 “북한주민들은 다 같이 못살지 않아요. 이곳은 빈부의 차가 심하지만요”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 사회에도 당 간부들은 잘 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계급이 소멸된 사회가 아니라고 시정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너희들이 한국에서 누리는 자유가 북한에서 허용되는 줄 아느냐. 북한은 전형적인 공산주의 국가도 아닌 김일성주의 국가이다. 평등과 자유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 유토피아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가 없으면 공기 없는 공간이나 같다”는 나의 생각을 말해주곤 했다.
이렇게 이념문제를 가지고 학생들을 붙잡고 토론하는 교수들이 별로 없었다. 잘못하면 게시판에 어용교수라는 딱지가 붙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소신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지도반 학생들은 몇 명씩 불러서 개인면담도 했다. 때로는 학부형에게도 직접 연락을 해서 학생들의 동향을 알리기도 했다.
제발 대학 졸업장은 손에 쥔 후에 사회로 나가서 싸우든지 말든지 하라는 당부와 양쪽 귀를 똑같이 열고 듣고 봐야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 사회대 학생회장이 졸업식을 마치고 나에게 왔다. “교수님 덕분에 졸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라며 기뻐했다. 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 후 그 학생과는 연락이 끊겼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정외과 학생들이 얌전히 스탠드에 앉아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는 시위학생들이 “정외과는 무얼하느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시위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야유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반 학생회장이 “큰일 났어요” 하면서 유인물을 내밀었다. 읽어보니 이숙종(친일파), 이현희(텔레비전 프로에서 정부 옹호발언) 이범준(유정회 의원)은 어용교수라는 내용이었다.
|
|
| ▲ CSIS에서 만난 브레진스키 박사와 담소하고 있는 남편 |
|
한편 우리 과에서 어렵게 교섭을 해서 이웅평 소령의 강연을 준비했는데 벽보를 붙이기만 하면 누군가가 찢어버린다고 학생회 임원들이 불평이었다. 그때 이미 학원가에 친북세력이 침투해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 행사는 취소되고 말았다.
어용교수라는 유인물이 유포되는데도 학교가 조용하니까 이번에는 화장실에 이숙종, 이범준, 김성진 교수 물러가라는 낙서가 있다고 어느 학생이 뛰어와서 알려주었다. 그 시절에는 학원에 출입하는 정보원이 있었다. 그 사람이 자기 소개를 하며 전국적인 학원가의 시위경향이 개인교수들을 문제로 하지 않고 있으며 유인물을 분석해본 결과 반미, 반정부에 관한 부분은 읽을 수 없게 흐려있고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부분만 명확하게 인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유인물이 정외과 학생들의 강의실에만 무더기로 뿌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배후자가 교내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외과 학생들의 여론을 들어보니 “이 교수님 강의가 좋다”고 대답하고 대부분이 유인물 내용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말까지 전해주고 갔다.
나를 동정하는 몇몇 교수들은 “연말이어서 보직교수 교체시기니까 이 박사의 보직을 막기 위해 선수를 쓰는 목적인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그 일을 꾸민 사람은 누군지는 몰라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숙종 학원장이 나를 사회과학대학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학원장이 “주변에서 말이 많았어”라고 한 말씀을 듣고 나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학원장이 이범준 교수에게 보직을 주면 학교가 시끄러워지고 학원장에게도 그 영향이 간다는 음해를 들으신 것으로 추측했다.
학기말에 지도반인 2학년 학생들과 종강파티 겸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순진한 학생들이 알려준 내용이 너무나도 허무맹랑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이숙종 학원장은 일제시대 때 정신대 지지발언을 한 문서가 있다고 하고 이범준 교수 부부는 정부와의 밀약으로 미국유학을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52년도에 내가 어느 정부와 무슨 목적으로 밀약을 했는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음해였다. 학생들도 믿지는 않았으나 그런 말들이 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Campus politics라는 말은 들었지만 내가 희생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82년에 정외과 주최로 이어령 교수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이 교수의 부인인 강인숙(건국대 국문학과 교수)과 여고 동기이고 절친한 사이여서 부인에게 청탁해서 겨우 섭외가 되었다. 전교생들에게 좋은 강의를 듣게 해주고 싶은 일념에서 이 행사를 구상했었다.
예상한대로 그날 강당이 꽉 차서 계단에까지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대개 각종 특강시간에는 학생들이 모이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그날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학생들이 이 교수의 한일 문화비교에 관한 강의를 2시간이나 미동도 하지 않고 들었다. TV, 방송국 기자들도 와서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교수 몇 분들의 뒷말이 있었다는 것이다. 행사자체보다도 나 개인에 대한 거부반응에서 나온 부정적인 평가라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