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약 없이 살았으면 (120...

당뇨 검사를 위한 입원

호프 박사가 소개해준 셔먼(Sherman) 당뇨 전문의를 만났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무척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일단 입원해서 인슐린 주사 맞는 방법과 알레르기 반응 검사를 하자고 했다. 셔먼 박사도 인슐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환자는 처음이라고 했다. 입원하면 입원비가 비싸니 통원치료를 할 수 있느냐고 그이가 물었다. 일시불로 안 해도 좋으니 입원해서 2, 3일 관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셔먼 박사 사무실에서 우연히 지금은 일산의 국립 암센터 원장으로 와 계시는 이진수 박사를 만났다. 호프 박사가 TAS-102를 쓰려고 한다며 너무 겁이 난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C-225를 먼저 쓰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C-225 는 FDA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항암약인데 그 약을 쓰려면 일정한 수속이 필요하다며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풀이 죽어있는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좋은 말을 많이 해주어서 그날은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혈압약을 평생 먹고 인슐린을 평생 맞으며 사는 사람이나 항암치료를 평생 받으며 사는 사람이나 꼭 같습니다” “환자들은 실제 상황보다 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니까 빨리 폐인이 되는 거지요” “정세영 회장도 집에만 있다가 남의 적극적인 권유로 골프를 한번 치고 오신 후부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잘 다니다가 암이라면 갑자기 인생의 끝이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등등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12월 7일, 그이가 입원을 했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이 없으면 입원비가 만만치 않다는데 왜 굳이 입원을 하라는지 모르겠다고 돈 걱정을 했다. 나는 “살려고 왔는데 집을 팔아서라도 모든 병을 고치는 것이 우리 목적이 아니냐”고 달래 주었다.

병실이 아주 작아서 보호자가 겨우 한 사람 앉을 자리뿐이었고 저녁시간이 되니 보호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루 종일 곁에서 지켜보니 30분마다 무슨 주사인지 조금씩 맞으며 관찰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슐린 알레르기 환자가 처음이므로 그이 혈액을 쟌스 홉킨스(Johns Hopkins University Hospital)에 보내서 검사를 시키겠다고 했다.

혼자 아파트로 돌아오니 성우가 보낸 이메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 표현이 풍부한 아들의 편지는 나를 울리고 말았다. 병원에 혼자 두고 온 남편이 가엾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에게 답장을 썼다.

하룻밤을 혼자 지내고 아침 일찍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그날 오후에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우리는 병원비 문제로 인한 염려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다. 셔맨 박사의 처방은 24시간 후에 반응을 보이는 ultralente (protamine이 없는 인슐린)라는 인슐린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써온 아반디야 (avandia)라는 먹는 당뇨약은 암세포가 있는 간에 해로우니 끊어야 한다고 했다.

몇 달 후 셔맨 박사에게 쟌스 홉킨스 대학교에 보낸 피검사 결과가 나왔느냐고 독촉을 하자, 피검사 결과 알레르기 반응요인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막연한 이야기만 해주었다. 인슐린 주사를 맞을 때 주사기 실린저에 피가 들어가면 인슐린을 주입하지 말고 피가 보이지 않을 때만 맞으라는 주의를 받고 그 의사와의 접촉은 끝이 났다.

젤로다 (Xeloda) 항암약

이진수 박사를 못 만났다면 죽으나 사나 TAS-102를 사용할 뻔 했으나 다행히 C-225 사용 허가가 나올 때까지 젤로다라는 먹는 항암약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진수 박사가 우리 주치의와 상의를 했나보다.

▲ 도미 치료 시 많은 도움을 줬던 이진수 박사 / 이박사는 훗날 국립암센터장을 지냈다 [출처 ; EBS 명의 갭처]

젤로다는 원래 유방암에 쓰는 약이라고 한다. 젤로다는 두 주일간 하루에 8정씩 들고 한주일 쉰 후 또 두주일 약을 먹는 사이클이었다. 일단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이 먹는 약이라니 마음은 놓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변비가 심해져서 고통스러웠다.

주치의사가 한국에서 잘라낸 종양 (tumor block)이나 혹은 전이된 간조직 (metastatic liver lesion biopsy)를 갖고 오라고 해서 우리는 서둘러 대장 수술을 한 삼성의료원과 간 수술을 한 세브란스 병원에 연락을 했다. liver biopsy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출하지 못하고 말았다. 바로 이런 점이 미국과 한국 병원의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처럼 수면제를 먹지 않는 그이도 12월 한 달 간은 약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휴스턴에 도착한지 며칠 안 되어서 필리핀의 신성오 대사, 뉴욕의 서대원 대사, 워싱톤 D.C.의 심윤조 공사 등의 위로 전화를 받았다. 객지에서 그것도 병 치료차 나와 있을 때 친지의 전화 한통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로가 되었다. 그 후 조중표 아트란타 총영사가 공휴일에 내려와서 임 총영사랑 골프를 쳤는데 오전에는 일어나지도 못했던 그이가 용하게 끝까지 마칠 수 있어서 기뻤다. 정신적인 요인이 신체적으로도 작용하는 것 같았다.

조중표 총영사, 심윤조 주워싱톤 공사, 최정일 청와대 비서관, 신동익 실장, 강경화 공사, 다섯 명이 돈을 모아서 외식비로 쓰라며 보내주었다. 가난한 공무원들이 모금한 이 선물의 가치는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이 귀중했기에 외식비가 아닌 병원비에 보태면서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이어서 김광웅 홍콩총영사가 워싱톤 D.C.에 다니러 왔다며 문안전화를 해주었다. 나는 그이에게 “당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분들이 많으니 늘 행복하다는 심정으로 살면 기분도 좋고 따라서 건강도 좋아질 것 같다”고 했더니 “고마운 사람들이지. 시한부 인생인 암환자를 잊지 않고 문안전화를 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거든”이라고 응답했다.

임병효 총영사 부인이 김병숙 전도사를 소개해주었다. 김 전도사는 기도로 자신의 암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임 총영사 부인과 함께 우리 아파트에 들러서 기도하는 김 전도사의 기도 내용은 늘 뜨거웠다.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그이가 입맛이 없다고 할 때면, 내외는 좋은 식당으로 안내해서 식사도 여러 번 했다. 김 전도사뿐 아니라 우리가 휴스턴에서 지내는 동안 신세진 분이 한 두 분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정희경 의원이 전화를 해 치료받지 않는 날은 텍사스 주에 있는 자기 농장에 가서 쉬고 오라고 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뿌듯했다. 우리를 생각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그 자체로 위안이 되었다.

정민자 전 보좌관이, 중앙일보에 1996년 총선 때 안기부 돈을 받은 정치인 180명 가운데 국민회의의 이종찬 의원과 그이의 이름도 포함되었다고 알려왔다. 180명의 은행계좌 추적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보좌관이 기자에게 1996년도 총선 때는 출마도 안하고 이미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긴 후인데 무슨 돈을 신한국당에서 받았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며칠 후 생각이 났는지 그이는 “1995년에 당에서 지역구 관리 지원비로 받은 돈인가?” “그때도 안기부 돈을 썼나?” 혼자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