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언론 (26회)

정치인과 언론

9대 국회의원으로서 내가 제일 혐오했던 것은 각 신문의 동정란 또는 가십난이었다. 나의 판단이 틀렸는지는 몰라도 그 시절 동정란에 대한 인상은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난을 신설할 때는 좋은 동기에서였는지 몰라도 어느새 정치인들의 촌지액수가 내용을 좌우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개인의원들의 PR의 장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진 유정회의장이 어느 날 나에게 이 의원은 많은 활동을 하면서 왜 신문사에 연락도 안하느냐는 것이다. 의아하게 생각한 나는 모 신문 기자에게 물어보니 남성 의원들은 단순 건강검진을 위해 입원을 하거나 강연을 한번 해도 전화로 동정란에 실어달라고 부탁전화를 한다는 것이다. 내 귀를 의심했다. 결국 그런 수단으로 일반대중을 호도할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던 적도 있었다. 요즘은 신문에 그런 난이 사라져서 다행이다.

반드시 신문에 많이 오르내리는 국회의원들만이 눈부신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격상 자기 홍보를 하는 것에 익숙치 않는 정치인들은 언론에 알리지 않고도 충분히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전혀 사실과 다른 기사가 동정란에 가십으로 기사화될 때는 기가 막혔다. 여러 사례를 경험했지만 한두 가지 예를 들면 1973년에 유엔총회에 대표단 고문자격으로 다녀 온 적이 있었다. 그 다음 해 9월 모 신문 동정란에 내가 구범모 의원과 경합을 한 결과 구 의원이 유엔 국회대표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경합을 한 적이 없었다.

또 세계반공연맹(WACL) 총회에서 나는 세계청년반공연맹(WYACL) 의장으로 선출되어 모든 행사에 참여를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모 신문 동정란에 “세계대표들을 불러놓고 이범준 의원은 일찍 집으로 가버렸다”는 엉뚱한 기사가 나왔다. 알아보니 당시 동국대학 이선근 총장을 나인 줄 알고 썼다는 것이다. 그밖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사건 당시 겪은 언론의 매도는 뒤에서 다루려고 한다. 일단 기사화하면 오보라도 손을 쓸 수가 없고 당한 당사자만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밖에 6년 임기 동안 나는 방한하는 외국 귀빈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영접하고 대접하고 환송할 때까지 안내하는 업무에 바빴다. 우리는 외국인들에 대한 과공이 예나 지금이나 문제인 것 같다. 무조건 분수에 넘치는 비싼 선물공세를 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진국일수록 더 한 것 같다.

▲ 필자의 인터뷰 기사 (매일경제 1975. 1. 20.) 정치인은 언론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홍보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 하겠다.

여당의원들에게 재야인사들과 대화를 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나는 학계, 여성계와 관련된 반정부 인사들을 초대해서 식사하면서 그들의 시국관을 들었다. 이태영 박사 같은 분은 아무리 야당이라 해도 가정법원장으로 임명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이숙종 의원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둘이 같이 유정회 정책의장을 만나서 그렇게 건의를 해보았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나는 이 박사와 같은 능력 있는 여성이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작고한데 대해 무척 아쉬워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1975년 태평로 의사당에서의 마지막 본회의에서 외교안보분야에 대한 대정부질의를 했다. 남편과 아들 그리고 김점곤 경희대 교수가 방청석에서 지켜보았다. 신문마다 좋은 평을 해주었다. 그 후 새로 지은 여의도 의사당에 입주하고 보니 여성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서 여성 화장실을 만드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설계사가 아마도 국회의원은 남성들로만 구성된 줄 착각을 한 모양이다.

여성의원들의 요구로 여성의원 휴게실도 새로 마련해서 여성의원들만의 만남의 장소로, 쉼터로, 기타 다용도실로 사용했다. 국회도서관의 신용순 씨의 청원으로 여성문제 자료실을 위한 공간도 이때 확보하게 되었다.

1973년 6・23 선언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제일 처음 의의있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973년 5월부터 적십자사 건물에서 외무위원 몇 명이 모여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토론에 참여한 일이었다. 며칠간 난상토론을 하고 보고서를 제출했고 청와대, 정부, 국회 대표들 간의 회의 끝에 완성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이었다. 6・23 선언으로도 알려진 이 특별성명으로 한국의 대북정책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중요한 골자를 요약하면 1)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2)국제연합 (UN) 다수회원국의 뜻이라면 우리는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가입 전이라도 한국대표가 참석하는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 토의에 북한 측이 같이 초청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3)한국은 호혜평등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이념과 체제를 달리 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냉전시대에 위와 같은 발상은 퍽 발전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하나의 한국이라는 종전 주장과는 달리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하고 남북 모두에 유엔 가입의 길을 터놓은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은 서방국가들과 수교를 했고 북한은 공산진영국가들과 수교관계를 맺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6・23선언으로 북한과 수교를 한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가질 것이며 우리와의 수교 국가들이 북한을 인정하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북한이나 조총련과의 대화는 국가보안법에 위배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국가안위와 관련된 분야는 대통령이 초헌법적 고유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유권해석으로 1973년 대통령 특별성명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6・23 선언이야 말로 오늘의 6・15 성명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대북 긴장완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