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김천초등학교에서 첫 유세가 시작되었을 때 아홉명의 후보 가운데 여덟명이 모두 우리를 집중 공격했다. 그이가 강적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훤하게 잘 생긴 후보가 나와서 상대방을 전혀 비방도 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기가 당선되면 낙후된 고향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일들에 대해서만 박력 있게 연설을 하자 유권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편의 유세가 끝나자 유권자들이 모두 썰물같이 퇴장했다.
그이는 악수를 너무해서 손가락 사이에 물집이 생겨서 고생을 했다. 나도 손가락을 구부리는 데 힘이 들 정도로 악수를 많이 했을 뿐 아니라 남편의 유세장에서 박수를 유도하기 위해서 어찌나 쎄게 쳤는지 손바닥에 피멍이 들었었다. 여성 유권자들은 악수를 하고나서도 뒷줄로 돌아가 다시 그이에게 가서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즐거운 비명이었다. 그이가 상대를 비방하지 않는다고 해서 유권자들은 그이의 별명을 ‘영국신사’ 또는 ‘국제신사’라고 붙여주었다.
80대와 70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님도 아들의 당선을 위해 옛날에 한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과 온 가족이 다니던 황금동 교회 교인들의 지지를 호소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특히 허리를 다쳐서 지팡이를 짚고 기호 5번을 외치며 다니신 시어머님의 간절한 모성애는 감동적이었다. 어느날 그이에게 쥐어준 종이조각을 보니 구약성서 이사야서 41장 10절이 쓰여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언젠가 나는 이태영 박사에게 “남편의 선거운동과 아들의 선거운동이 어떻게 다릅니까?” 라고 여쭈어보았다. 이 박사는 “그거야 아들 선거가 더 애가 탔지”라고 대답하셨다. 나의 시어머님도 마찬가지셨을 것이다.
우리를 지지하는 유지들에게 파면시킨다는 협박이 들어오지 않나, 우리 운동원들을 금전으로 매수하지를 않나, 여당은 마음대로 현금까지 돌리면서 우리 운동원들의 뒤를 밟아서 잡아가지를 않나, 온통 기가 막히는 일 뿐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기자들을 붙잡고 부정선거를 호소하면 일단 종이에 기록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신문에는 내주지 않는 것이다. 담벼락에 호소하는 격이었다. 그만큼 기자들도 거물급 정치인을 두려워했는지 아니면 기사화해도 위에서 안 내주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청와대에서 백 의장을 옹호하는 답이 오지 않아서 선거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40대 초반부터 주례를 섰지만 나도 선거 기간 중에 주례경험을 세 번이나 했다. 우리 부부같이 금슬 좋게 살고 싶다며 박 후보가 바쁘면 사모님도 괜찮다고 주례 부탁이 들어왔다. 여자가 주례를 한다니까 많은 하객들이 몰려들었다. 멀리서 보니 시아버님까지 며느리가 어떻게 하나 보러 와계셨다.
네 번째로 상주에서 주례를 서기로 되었던 날이다. 예식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이 되어도 연락이 없더니 예식장 주인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 박사를 주례 서게 하면 영업정지를 시킨다니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아마도 공화당은 내가 주례를 선다는 것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런 일을 갖고 예식장 주인을 협박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백 의장은 모르는 일이었으리라. 운동원들이 무리를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선거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새벽에, 막내 시동생의 친구가 김천초등 하교에서 숙직을 마치고 나오니 교정에 전단이 뭉텅이로 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박살났다 박정수. 기피자다 박정수. 정직하다 정휘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 운동원들은 즉시 새벽에 모든 학교를 다니며 전단을 수거했다. 그러나 이 내용은 너무나도 야비한 것이어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누가 했다는 것이 확연히 나타나는데 얕은 수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정휘동 후보 측에서 뿌린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다음에는 고향이 ‘이북따라지’라고 지역감정을 유발시키는 전단도 뿌려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소문은 잘 먹혀들어가는 분위기여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유세장에서 정면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우리 부모님은 이북에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유치원부터 학교에 다녔고 이곳에서 성장했습니다.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이북동포를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는 세상에 어떻게 부모님의 고향이 당락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본인이 떳떳이 밝힘으로써 겨우 그 이슈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뿐 아니다. 12월 9일 중앙초등학교 유세장에서는 공화당 측에서 그이의 연설 도중 마이크를 꺼버렸다. 이 일로 우리는 오히려 동정표가 쏟아지는 행운을 얻었다. 패배의식이 생길수록 이성을 찾고 침착해야 하는데 반대로 비이성적인 일을 함으로써 일이 더 꼬여서 지지율을 하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 같다.
마지막 유세 때는 백 의장의 처남인 박준규 의원이 대구에서 자신의 선거운동도 중지하고 김천으로 와서 응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드디어 선거 전날 밤이 왔다. 선거참모들과 같이 선거당일에 관한 회의를 했다. 우리는 선거를 처음 경험하지만 참모들은 과거 여당후보를 위한 선거를 여러차례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부정선거의 패턴을 알려주었다. 과거에는 여당 측은 상대 지지자들에게 투표용지를 안보내기도 하고, 선거인 명부에 1할 정도의 유령인수를 포함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투표당일 밤 투표함을 사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수법으로는 투표함을 실은 자동차가 도중에 함 바꾸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투표함을 실은 자동차 뒤를 따라가며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어느 미개국가에 온 기분이 들고 겁도 나고 무서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