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러시아 대사와 일본 정치부...

주한 러시아 대사와의 대화

주한 외국대사들 역시 진정으로 그이의 이임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張庭延 중국대사도 김종필 총리께 이임인사를 하러 갔을 때 “박장관의 해임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파나시에프 주한 러시아 대사내외가 우리내외를 초청했으나 몇 달간 그이도 바빴고 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미루다가 연말에 그들 초청에 응했다. 러시아 대사 부인은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한국에서 수지침을 배워 휴가 때면 러시아에 가서 남들을 가르칠 정도라고 자랑도 하며 한국생활에 대단히 만족하는 듯 했다. 그 날 다른 사람은 초청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오고 간 대화가 있다.

첫째, 99년 김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시 옐친의 건강상 기본적인 것만 옐친이 서명하고 나머지는 프리마코프 총리(외무에서 총리로 승진)가 담당해야 할 형편을 우리 정부가 양해하도록 설득해달라는 부탁의 말이 있었고,

둘째, 프리마코프 당시 외무장관은 박장관 해임에 크게 놀랐으며, 만일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외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야 한다는 말을 자기에게 했다는 것이다.

셋째, 이인호 대사를 카라신 차관이 불러서 조 참사관의 추방문제를 알려 주니까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해서 자기들은 거짓말하는 줄 알았는데, 후에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넷째, 조 참사관 사건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서 (1) 그동안 불법 행위자들을 조용히 추방하면서 한국 안기부에 이미 세 번이나 “공개적인 첩보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또 한번 그런 일이 생기면 공개하겠다고 경고를 한바 있으며, (2) 뇌물공여 장면을 현장에서 체포했고, (3) 러시아의 고위공무원이 개입되었다는 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고한대로 언론에 공개했다는 변이다. 위의 (1) 사항을 외교부는 몰랐을 것이다.

마닐라 2차 회담후 프리마코프가 약속을 깨고 언론에 협상내용을 공개한데 대해서만은 설명이 불분명했다. 자기들은 대외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니 그런 약속을 안 한 것으로 이해를 했다는 식의 이상한 답변을 했다. 내가 추궁하니까 그이가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어서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대사는 발표내용을 공동작성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귀가 길에 그이는 “대사인들 장관의 돌출 행위의 동기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며 “상대방의 입장을 곤란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나를 꾸짖었다.

아파나시에프 대사 내외는 자기는 인간적으로 박 장관을 좋아하고 모든 대사들도 박 장관이 그 어느 장관보다 소탈하고 친절해서 인기가 있었는데 외교부를 떠나게 되어 무척 아쉬워들 한다고 전해주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또한 그이가 여성을 강대국인 러시아 대사로 임명한데 대한 비난이 비등했기에 러시아 정부의 반응은 어떠냐고 물었다. 여름휴가를 러시아에서 보내고 온 아파나시에프 대사는 한국 언론보도와는 달리 처음으로 러시아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를 전공한 학자 출신의 외교관을 임명한데 대해 모두 만족하고 있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한국 언론이 사실과 거리가 먼 내용을 소설처럼 기사화하기 때문에 자기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털어놓았다.

일본 정치부장들이 만든 洙友會

장관이 된지 얼마 안 되어 한국을 방문한 일본신문 정치부장들과 공관에서 간담회를 가진 후부터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이가 장괸직에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사히 신문 정치부장이 다른 정치부장들을 대표해서 편지를 보냈다:

▲ 일본 주요신문의 정치부장들이 만든 洙友會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갔을 때 도쿄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사임하셨다는 돌연한 소식에 우리들은 매우 놀랐습니다........돌이켜보면, 4월 말 (98년)선생께서 우리들을 서울에서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솔직한 말씀을 통해 우리들과 의기투합하여 주셨습니다. 5월 방일시 우리들이 주최한 이례적인 오찬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선생의 고매하신 인격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일한관계에서 선생과 같은 분이 귀중하다고 보고 있는 만큼 금번 소식에 더욱 아쉽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선생께서는 일한관계 개선에 의욕이 넘치는 분임에 틀림이 없어 가장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 우리들 정치부장단 모임이 있어 선생에 관한 소식이 화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합의가 있었기에 알려드립니다.

1) 박정수 선생을 위한 모임을 약속대로 앞으로도 계속함.

2) 선생을 위로하기 위한 밤 행사 개최를 위해 가급적 조기 방일을 기대함.

또한 모임의 명칭을 선생의 이름으로부터 한 글자를 따서 “洙交會” 또는 “洙友會”로 칭하고자 하는데 어느 것이 좋을지 견해를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98년 8월 12일

일본정치부장단을 대표하여

아사히신문 정치부장

와카미야 오시부미

그 후 그 모임을 남편 이름 가운데 洙를 따서 ‘洙友會’로 결정하고 우리를 부부동반으로 초청했으나 그이의 국회일정 때문에 99년 1월 14일에야 초청에 응했다. 동경에서 이름난 전형적인 요정으로 초대 되었는데, 그 식당의 식사비용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주일 한국대사관의 유병우 정무공사와 함께 참석해서 장시간 그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여러 분야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한국에서 외교부의 조중표 보좌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장관, 차관의 양해사항이라면서 어업협정의 실무협상이 난항에 부딪쳤으니 일본에 간 김에 오부찌 외무장관 등 정계 지도자들을 만나서 협조를 구해 달라는 청이었다. 그래서 오부찌 외무장관을 비롯해서 사또 수산청장, 다깨시다 전 총리, 나까소네 전 총리 등과의 대담도 가졌다.

그 모임이 있은 후 보낸 産經新聞社의 小林靜雄 정치부장의 편지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기는 한국인 가운데 박 장관님 같이 마음의 벽을 허물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고 하고 ‘洙友會 같은 모임이 확산된다면 폭넓은 일․한 우호관계의 자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14일 洙友會 모임 다음날 오부찌 총리에게 전화로 박 장관님과의 관계와 洙友會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洙友會가 일한관계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고 자랑하니까 오부찌 총리가 ‘참으로 좋은 모임이니 부디 오래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오부찌 총리와 그이와의 회합이 끝나자 총리비서관이 자기에게 전화로 총리가 ‘박 선생은 일본 정치부장들과 좋은 모임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본 정치부장들로부터 칭찬을 들어 본적이 없는데 박 선생은 평판이 대단히 좋습니다’라고 부러워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전하더라고 편지에 써 있었다. 어느 나라나 언론과 정치인과의 관계는 흡사한가보다.

洙友會는 그이가 암으로 투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통의 위문편지를 보냈고 세상을 뜬 후에는 빈소에 조전, 조화를 보내주고 배우자인 나에게도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 등 끝까지 관심을 기울여 준데 대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일본은 언론인들도 국익을 위한 외국 친구 만들기에 시간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쏟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도 본받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