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는 부풀었던 꿈에 비해 현실적인 성공도는 크지 못했으나, 나로서는 학문적으로 평생의 연구 테마를 얻는 귀중한 시기가 되었다.
1948년 어느 날, 아침 공장에 출근한 나는 시험대 위에 놓인 아세탈데하이드 수용액이 든 유리병에서 심한 식초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고무 마개가 없어져 누군가가 짚을 뭉쳐 마개를 대신 해놓은 병이었는데, 병목을 만져보니 뜨끈뜨끈 했다. 볏짚이 아세탈데하이드와 접촉한 결과 촉매작용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가능성을 가지고 실험을 거듭했다. 공장도 문을 닫은 상태에서 머리도 식힐 겸 공부나 계속 하자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논문이나 업적이 충분한 이에게 대학원 입학자격을 인정한다는 학칙에 의해 나는 그해 서울공대 대학원에 들어가서, 이 실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아세틸데하이드 기상 산화(氣相酸化)에 관한 연구>라는 석사논문을 썼다. 이 주제는 사실 9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아직 가능성을 지닌 연구로서 나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북에서 송전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정지 상태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공장을 그대로 놓아 둔 채 대학원에 다니던 그 시절에 나는 아내가 될 나영균을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게 바랐던 고등문관 시험 합격을 단념한 후 이번에는 나의 배우자를 고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수많은 규수와 맞선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어젯밤 좋은 꿈을 꾸었으니 오늘은 네 색시 감을 만날 거다. 고목나무에서 매화가 만발하는 꿈을 꾸었단다.”
그날 어머니는 꿈을 믿고 이화여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 학도호국단 훈련을 받느라 운동장에 나와 있는 900명의 전교생 가운데에서 나영균을 지목하여 꼽아가지고 오셨다.
어머니의 말로는 아가씨가 후덕하게 생기고 인품도 아주 좋아 보이더라며, 집 위치를 알아놓고 왔으니 내일 당장 함께 그 집으로 가서 먼발치로 색시를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버릇이 또 나오셨다 정도로 생각했으나, 한번 말을 꺼내면 물러설 줄 모르는 어머니기에 다음날 아침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어머니가 신교동에 있는 그 집 초인종을 누르자 아가씨가 나왔다. 어머니 얼굴을 보더니 “곧 나올 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며 도로 들어가려 했다. 어머니가 “어젠 함께 학교에 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오늘 아침 일이 생겨 갈 수가 없게 돼서 이렇게 왔수. 미안해요.” 라고 하자 아가씨는 “네, 그러세요. 저야 아무래도 학교 가는 거니까 아무 상관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전날 아가씨의 뒤를 밟아 신교동 집까지 따라 가셨던 어머니는 어떤 학생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학교에 같이 가달라고 부탁을 하셨던 것이다. 작업복으로 허름하게 차려 입은 나는 어머니 뒤로 그 집 앞을 천천히 지나면서 아가씨를 눈 여겨 보았다.
당시 대부분의 여학생이 하던 파마머리와는 달리 이 아가씨는 귀밑에서 머리를 싹뚝 자른 단발머리였다. 옷차림도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로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머니가 집은 큰데 차림새가 그래서 그 집 침모의 딸인가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가씨의 태도로 보아 사용인의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목소리가 크지는 않아도 또렷하고, 어른 대하는 몸가짐이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 같았다.
문패에는 나경석(羅景錫)이라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돌아와 나경석 씨에 대해 알아보았다. 동경유학 때 공과를 전공하고 항일운동을 하던 분이라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김달진 씨라는 분이 나의 부모도 알고, 나 씨 댁 어른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분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 댁에서는 딸을 유학 보낼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김달진 씨는 끈기 있게 교섭을 벌여 상대방 부모님을 내가 지은 빙초산 공장으로 모셔오게 해주었다. 그 댁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 모로 보나 교양인다운 분들이었다. 그 댁 아버지는 깊은 관심을 보이며 내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 후 맞선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후문에 의하면 장인 될 어른이 같은 공과라 공장을 보고 엔지니어로서의 나의 재능과 기술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맞선은 보통 음식점에서 하던 시절이었으나, 상대편에서 신교동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 왔다. 아가씨는 여전히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타났다. 그것이 오히려 청초해보였다. 그 날부터 나는 공업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나경석 선생과 의논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면서 날마다 신교동에 일참(日參)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일참은 약혼의 허락이 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처음에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영균이도 나의 끈기 앞에 함락되고 말았다.
약혼식은 1949년 9월 9일 6시 서울 장안의 유명한 양식당 호수(湖水)그릴에서 있었다. 친척과 몇 명 안 되는 친구들이 모인 약혼식에서는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주례역할을 해주셨다. 장인어른은 동경유학과 항일운동을 하던 시기에 신익희(申翼熙), 장덕수, 김성수,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송진우 씨 등과 동지로 지냈다. 조소앙 씨도 그 중의 한 분이었다.
내가 구체적으로 석유화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해방 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접할 수 있게 된 외국문헌에 의해 나는 어떤 발견을 하게 되었다. 즉 2차대전에 패한 독일에서는 아세틸렌 화학이 화학연구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반하여 승전국 미국에서는 석유화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독일에는 석유자원이 없었으므로 이것은 독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여 모든 공업을 일으키는 근간이 되며 합성섬유, 합성고무, 합성수지 등의 화학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석유화학이 세계적으로 큰 역할을 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석유화학공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