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 계열공장 중 합성세제 원료인 알킬벤젠 공장의 실수요자로는 이화여대가 소유하고 있던 이수산업이 선정되었다. 이수산업은 김활란 선생이 해방 후 ‘이화 사위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만든 이수회(梨樹會))의 이름을 딴 학교재단 수익사업체다. 자금이 없어 유명무실하던 기관이었는데, 울산의 알킬벤젠 공장의 실수요자가 된 것이다.
이수산업은 한 때 상공장관을 하던 김일환 씨가 사장을 하다가 그 후 이대 부총장을 지낸 최재유(崔在裕) 박사가 명목상의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1973년에 이화여대에서 내게 이수화학(梨樹化學) 사장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왔다. 이대로서는 화학공업 공장의 실수요자가 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대학교수들 중에 공장을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총장이던 김옥길 선생이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김옥길 선생은 6.25당시 내가 부산에서 정유공장 건설을 꿈꾸며 김활란 선생을 찾아가 포부를 토로하던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산 피난 시절에 미국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가까이 지낸 일은 없는 터였다.
어느 날 갑자기 김옥길 총장으로부터 점심 초대를 받은 나는 그 댁의 명물인 냉면을 먹으면서 그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울산에 이수화학의 공장을 짓고 운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옥길 총장은 예전에 내가 김활란 총장이 운영하던 코리아타임스를 위해 오프셋 인쇄기를 사다드린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오프셋 인쇄기는 첨단기계에 속하는 것이었고, 코리아타임스는 그것을 이용하여 신문을 만드는데 덕을 많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활란 선생은 6.25 전쟁의 어려운 와중에 공보처장을 하면서 이화대학 외에 코리아타임스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대는 아내가 교직에 있는 대학이기도 하고 또 김활란 총장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못하던 나는 이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 반가워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일을 맡고 보니 사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자금은 독일의 우데(Friedrich Udeh Engineering) 회사에서 차관을 받아 건설하기로 되어있고, 기계는 이미 들어와 보세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였다. 문제는 발주당시 1달러가 4마르크이던 것이 당시에는 1달러 당 1.7마르크가 된데 있었다.
이것은 건설비가 차감해온 금액의 2배 이상 든다는 뜻이었고, 건설에 필요한 독일 기술자들을 데려오자면 그 비용 또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또 융자를 청구한 산업은행에서는 학교재단의 보증을 요구하고 있었다. 학교로서는 학교를 담보로 돈을 꿀 수도 없어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김옥길 총장은 김활란 박사가 작고하시기 전에 이수화학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전민제와 의논하라고 하셨다며 지금의 어려움을 어떻게든 타개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일을 맡고 나서 현장에 나가보니 그곳에는 우데의 사원 5명과 UOP 사원 4명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보수를 받고 해외파견 나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건설비용은 절감하기 위해 우선 비싼 외국 엔지니어들을 철수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수화학의 경성세제(BAB) 원료공장은 주요설계와 주요자재 구매를 제외하고는 전엔지니어링과 신한이 공장 건설 시공 일체를 도맡아 1972년 준공했다. 생산규모는 연간 1만 3,000톤이며 석유화학단지에서는 가장 규모가 작은 공장이었다.
그런데 이수화학에 뜻밖에 호기가 찾아왔다. 미국의 세브론(Shevron)사는 그동안 인도네시아에 알킬벤젠을 수출해왔으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물품취득에 어려움이 생기자 우리 공장에 1만톤을 급히 공급해줄 수 없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원래 공장 능력은 1만 3,000톤이었으나 수요가 많지 않아 1만 톤만을 만들고 있었던 터에 부랴부랴 증산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세브론과의 약속을 지켰고, 그 결과 생산규모를 2만 톤으로 늘리게 되었다.
이수화학 초기의 세제 수요는 크지 않았다. 가전제품이 서서히 떨어지던 때이라 세탁기 보급은 아직 활발하지 못했다. 1969년 금성사(지금의 LG)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탁조와 탈수조가 분리된 세탁기를 생산했으나 단 195대를 만들고 중단하고 말았다. 힘든 손빨래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은 좋으나 그 가격이 대학 졸업생 초봉의 두 배 이상이나 되고 전기도 많이 들어간다고 해서 주부들이 선뜻 사지 못했던 것이다.
금성사는 서서히 변해가는 추세를 타 1971년부터 다시 세탁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손빨래를 하더라도 고형비누 대신 가루비누를 풀어 사용하는 가정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세탁기 보급이 늘어나고 합성세제의 사용이 급증하기 시작하자 경성세제의 유해성이 비판의 대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공부는 연성세제(LAB)가 한국으로서는 시기상조라고 보고 있었다. 연성세제는 물에 빨리 분해되지만 독성은 오히려 더 강하고 한강물의 오염도가 기준치인 0.5887PPM을 한참 밑돌기 때문에 아직은 새로운 투자를 하여 시설 교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가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