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는 사우디 당국에게 한국을 비우호국 명단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 당국은 한국이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의 독립권을 인정하지 않는 아랍주의(Arab Cause)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 비우호국 명단에서 빼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데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위해 유태계 자금을 차관으로 대폭 받아들여 왔던 터이라 이런 성명을 공포하기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외무부에서는 경제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랍주의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겅제부처에서는 그렇게 하면 유태계의 외자도입선이 끊어진다고 반대하여 이견이 분분했다.
한국 뿐 아니라 원유 감량에 목이 조이던 각국들은 견디다 못해 아랍주의 지지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11월 18일이 EC(유럽공동체) 9개국이 친아랍 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11월 22일에는 일본이, 다음으로는 필리핀과 태국이 지지성명을 냈다.
한국정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아랍지지 문서를 작성하여 김정태(金正泰) 외무차관보를 보내 윤경도(尹慶道) 사우디 대사와 함께 사우디 외무부에 전달하게 했다. 그것을 알게 된 주한 이스라엘 대사는 윤석헌(尹錫憲) 외무 차관보를 찾아와 격렬하게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1973년 12월 정부는 성명만으로는 부족하니 특사를 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일행은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김정태(金正泰) 외무부 경제차관보, 최종명(崔鍾明) 상공부 자원차관보, 전민제(全民濟) 경제과학심의위원, 정동렬(鄭東烈) 청와대 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관직도 없는 일개 사업가에 불과한 내가 특사 일행에 끼게 된 것은 오직 나만이 파이잘 왕과 줄이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석유파동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선경 최종현(崔鍾賢) 씨의 의뢰를 받아 선경 정유공장을 설계 중이었고, 그 관계로 여러 차례 사우디에 오가고 있었다. 선경은 걸프오일로부터 유공을 인수하는 가능성이 생기기 전부터 테이진과 합자로 석유사업을 할 계획이 있었으며 테이진의 사장 오야 신조[[大晟信造]] 씨는 내가 유공을 세울 때 얼마나 많은 난관을 헤쳐 가며 피나는 노력으로 일을 추진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오야 사장은 내가 선경의 일로 사우디로 갔을 때 카말 아담(Kamal Adaham)이라는 석유광물자원 장관을 소개시켜주었다. 아담 씨는 카이잘 왕의 처남이며 사우디에서는 왕 다음 가는 권력자였다. 1964년부터 1979년까지 정보국 국장을 지냈으며 산업화를 위한 굵직한 공사계약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인물이었다.
나는 아담 씨에게 선경석유를 위해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1975년에 시작할 정유공장을 위해 1980년까지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를 공급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 한 결과 일단 구두로 상대방의 승낙을 얻어냈다.
아담 씨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조카 베드라위 씨를 나에게 소개하고 그를 위해 불포화폴리에스터 수지공장을 지어달라고 한 바 있었다. 나는 이 일로 사우디를 어려차례 방문했고, 베드라위 씨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여주에 있는 우리 농장에도 다녀갔다.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잘 생긴 얼굴에 아랍인답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설탕을 탄 아이스티를 맥주 조끼 만한 유리잔으로 마시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베드라위 씨를 위한 불포화폴리에스터 수지공장을 제다에 지어준 관계로 고관들과 줄을 댈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비서 김정렴(金正濂) 씨는 나를 특사의 일원으로 꼭 넣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진언했다. 대통령은 전에 석유공사를 만들 때 만난 일이 있고, 또 그 후 석유공사의 걸프오일계 부사장 임명 건이 발생했을 때, 측근의 중상으로 나를 배척한 일이 있어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비서실에서는 관직이 없는 나에게 경제과학심의위원이라는 타이틀을 주어 특사로 파견하도록 한 것이다.
1973년 12월 11일 오후 5시 특사일행은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동경, 홍콩, 방콕, 뉴델리, 테헤란을 거쳐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그때만 해도 직항 비행기가 없었던 것이다. 베이루트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 탄 우리는 13일 오전에야 제다에 도착했다.
도착을 하고보니 정부의 석유대책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한국의 주미대사가 그동안 있었던 정부의 친 아랍 지침을 모르는 채 워싱턴에서 “한국은 중동사태에 대해 노코멘트”라고 언명한 것이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다. 외무부가 정부의 이러한 정부의 입장변화를 공식으로 발표하지 않고 한국과 아랍의 공관에만 알렸기 때문에 일어난 불협화음이었다.
정부와의 연락 사무 때문에 최규하(崔圭夏) 씨를 베이루트에 남긴 채 제다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사우디 정부의 냉랭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위와 같은 이유를 알게 된 우리는 최규하 씨에게 전보를 보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일주일 내에 외무부가 아랍지지 성명을 공식 발표하고 AP와 UPI 통신사 같은 세계적 언론기관에 기사를 실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 결과 12월 15일에 한국정부는 공식 입장을 천명했다. 그 요지는 대한민국은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와 관련 국가들의 진지한 노력에 의해 중동지역에 항구적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정부로서 중동지역 평화성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①구제 분쟁은 무력이 아닌 평화적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하며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은 용납하지 않는다. ② 이스라엘은 1967년 당시 점령한 영토로부터 철수해야 한다. ③ 팔레스타인의 정당한 주장은 존중되어야 한다. ④모든 국가는 그 독립, 영토 보존과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정부의 성명이 나오자 아랍 측에서도 태도를 바꿔 통지를 보내왔다. 12월 17일 오전 10시에 파이잘 왕이 특사일행을 알현한다는 내용이었다. 일행은 부랴부랴 왕의 거처가 있는 리야드로 달려갔다. 아랍의 궁전에서 있었던 회담은 40분 동안 계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가 전달된 뒤 파이잘 왕은 우리에게 국제정세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시오니즘이 악마보다 악랄하다는 논평과 함께 공산주의는 시오니즘의 딸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사우디를 지지해주어 고맙다며 한국은 사우디와 형제 간이니 원유를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특사의 임무는 비로소 완수된 것이다. 우리는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만족감과 안도감을 안고 12월 24일 오후 7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꼼꼼한 상품이어서 내게 자필로 쓴 편지를 보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