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석유파동이 일단락되어 지고 1974년 4월부터는 원유수급이 완화되어 경제발전도 그대로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석유소비국들은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원유값 때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반면 산유국들에서는 무더기로 들어오는 오일달러로 벼락부자들이 양산되었다.
유럽의 큰 도시 거리에는 검은 베일을 쓴 여자들을 여러 명 씩 거느린 아랍남자들이 활보했고, 일류 호텔들은 아랍인 가족들이 전세를 내다시피 했다. 아랍 어린이들이 종일 복도를 뛰어다니고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가 하면 큰 병원들은 건강진단을 받겠다고 집단으로 입원해 들어오는 그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었다. 보석상들은 아랍 여인들 취미에 맞는 화려한 디자인과 굵은 보석알을 사용한 오색이 찬란한 장신구를 만들게 되었고, 의상 디자인도 아랍식 펜츠를 변형시킨 바지가 유행하게 되었다.
1973년 10월 19일에 배럴 당 3,011 달러이던 원유가 1974년 1월 1일에 1,1851 달러가 되었고, 계속 올라간 가격은 멈출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러한 원유대금 증대는 자연히 물가를 상승시키고 국제수지를 악화시키며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1975년에도 대통령 특사 일행과 다시 사우디로 갔다. 이번에는 최규하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 김정태(金正泰) 외무부 정무 차관보, 김동휘(金東輝) 외무부 경제차관보와 내가 그 구성멤버였다. 나는 전번과 같이 경제과학심의위원의 자격으로 일행에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부총리이던 남덕우(南悳祐) 씨에게서 산유국의 장기저리 오일달러를 도입해오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있어 나는 이번에도 사전 교섭을 위해 이보다 앞서 사우디를 몇 번 씩 오고갔다. 당시 세계 각국은 오일달러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사우디로 달려들고 있는 판이었다. 나는 예비교섭단계에서 한국 측이 건설공사를 맡아 하는 대가로 오일달러 차관을 청한다면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당시 한참 해외공사 수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막상 사우디로 가서 파이잘 국왕을 만나고 보니 왕은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돈을 얻으러 몰려오는데 사우디도 건설사업을 비롯하여 돈 쓸데가 많다는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이었다. 최규하 특사가 나의 제안대로 차관을 건설공사로 갚겠다고 하자 사우디 측에서는 5억 달러의 차관을 주는데 동의했다. 즉, 한국의 기술력을 이용하여 사우디가 필요로 하는 공장을 지어주면 건설비용을 미리 차관으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론을 얻고 특사 일행은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우리가 베이루트에 도착하자 파이잘 왕이 조카에게 암살당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975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우리가 며칠 전에 만났던 왕이었다.
파이잘은 1964년 왕위에 오른 이후로 경제증강, 교육제도 확립, 대학건립, 텔레비전 방송국 설치 등 현대화를 위해 많은 개혁을 추진시켰다. 그러나 이슬람교국인 사우디 내부에서는 왕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이 있었다. 그들이 가장 강하게 반대한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텔레비전 방송국의 개설이었다.
어느 날 건설 중이던 방송국은 괴한에게 습격을 받았다. 경비병이 괴한을 사살하고 보니 그는 파이잘 왕의 조카였다. 파이잘 왕을 시해한 것은 이때 사살된 괴한의 파이잘 동생 파이잘 빈 무사이드(Faisal bin Musaid)였다. 아까운 지도자가 개인적인 감정에 눈이 먼 광신자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특사 일행은 문상을 하러 다시 사우디로 되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대로 귀국할 것인지를 두고 논의했다. 나는 내가 비행기 전세 내는 값을 지불해도 좋으니 문상을 하러 가야 한다고 강변했으나 최규하 씨는 정부의 의향을 문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의에 대해 정부는 그대로 돌아오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이때의 처사는 사우디의 심기를 몹시 상하게 했다. 문상의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장례가 끝난 뒤 며칠이 지난 뒤 당시 국무총리이던 김종필 씨가 문상을 갔으나 대응은 냉랭했다. 적시에 문상하지 못한 심기가 가져온 결과였다.
외교적 과오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파이잘 왕의 아들 터기(Faisal bin Abdulaziz Al Saud)왕자가 한국에 왔다. 아버지 파이잘 왕이 약속한 5억 달러에 관하여 의논하러 온 것이었다. 그가 띠고 온 사명의 중대성으로 보아 그는 국빈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의 공식 지위가 우리나라 중앙정보부장 지위에 해당한다는 기계적인 판단에서중앙정보부장이 그를 접대 했을 뿐 그에게 대통령을 만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가 내심 어떻게 느꼈는지는 가히 짐작할 만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만에서는 당시 총통이던 옌자간(嚴家凎) 씨가 공항까지 나가 그를 영접하고 그가 체류하는 동안 거국적으로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 결과 대만은 5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냈고 우리나라는 파이잘 왕의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억 달러 밖에 얻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외교술의 약점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이때 차관의 조건은 연이자 2%에 10년 거치 20년 상환이라는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물론 2억 달러도 당시로서는 거대한 액수여서 우리 경제발전의 좋은 밑거름이 되긴 했으나 그 두 배가 되는 5억 달러도 처신하기에 따라서는 얻을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을 남길 수 없는 일이었다.
1974년 전후해서 우리나라 건설업계는 중동으로 많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노동력 제공뿐만 아니라 주계작자로서 설계와 건설을 직접 맡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현대건설에서도 알 주베일 항의 공사를 맡아 완공하면서 한국의 건설업의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석유파동으로 벼락부자가 된 산유국들이 건설 계획을 연달아 세우자 업계에는 일감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업체는 값싸고 일을 빨리 해서 공사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어 크게 호평을 얻었다.
1974년에 새로 건설부장관으로 취임한 김재규 씨는 해외진출 업체를 엄선하여 허가하는 정책을 폈다. 이것은 선택된 업체의 사업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규 씨 후임으로 온 신형식(申炯植) 건설부장관은 경쟁의 자유, 기회의 균등을 내걸고 지금까지 20사로 묶었던 진출회사 수를 4배가 되는 79사로 늘렸다.
이것은 1978년에 국회의원 선거를 겨냥한 선심정책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 업체들이 외국회사 뿐만 아니라 국내업체들끼리 경쟁을 하게 되었다. 이미 진출하여 일 잘하고 있는 업체의 전문 인력과 기술력을 빼내는 스카우트 전쟁, 덤핑으로 공사를 따 내고 선수금으로 받아 부동산으로 이익을 내려는 출혈 입찰, 중장비 과잉 등은 서로의 걸림돌이 되었고 부실기업이 속출했다.
해외진출 회사를 늘리는 정부시책이 업체 간 과당경쟁을 불러와 출혈입찰, 부실기업 속출로 이어졌지만 먼저 진출한 신한기공과 전엔지니어링은 꾸준히 성장해갔고 업적을 착실히 쌓아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나는 여의도 광장 앞에 땅을 사들여 1976년부터 10층 규모의 사옥을 짓기 시작했다. 1979년에 사옥이 완성되자 우리는 이사했다. 전엔지니어링, 신한기공, 이수화학이 모두 거뜬히 신사옥 안에 수용되었다. 지금까지의 셋방살이를 면하고 널짝한 공간에서 일을 할수 있게 되니 사원들의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