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발생과 이직 (19회)

집권당의 민주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이었던 김성곤(金成坤) 씨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한 대선 및 총선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1966년에 걸프오일에 100만 달러를 헌금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수령하였다. 그는 다시 1970년에 걸프오일에 1,000만 달러를 헌금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300만 달러에 합의하고, 1966~1970년 2차에 걸쳐 합계 400만 달러를 걸프오일로부터 정치자금으로 수령하였다.

당시 걸프오일에 국내 사업규모나 장래 계획을 감안할 때 정치헌금 거부로 올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이러한 정치헌금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나는 1970년 헌금과 관련하여 당시 걸프오일 사장이었던 도시(Bob Dorsey) 씨가 내 의견을 물었을 때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외국기업이 한국정부에 정치 헌금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헌금은 이루어졌고 이러한 헌금 때문에 후일 걸프오일의 회장이 된 도시 씨는 1975년 미국 의회의 청문회에 출석하여 증언하여야 했으며 걸프오일이 한국 내에서 행한 다른 부적절한 거래와 이에 수반한 금전의 거래도 도마 위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도시 씨는 걸프오일의 회장 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걸프오일은 미국 증권거래 위원회((Securities Exchange Commission)가 요구하는 치욕스러운 동의문서(Consent Decree)에 서명하고 이행하여야 했다.

▲ Bob Dorsey(오른쪽) 걸프오일 회장에게 유공 사장인 이성호 제독이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일방 유공은 걸프오일과의 합작계약 등을 수정하고, 외자도입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쳤다. 주요 수정내용은, 걸프오일이 2,500만 달러를 증자해 50% 주주가 되는 동시에 경영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이 내려지자 걸프오일은 내게 걸프오일이 지명할 수 있는 수석부사장(Chief vice president) 자리를 제안해왔다. 나는 계속 일할 자리를 갖는 것은 좋으나 국영기업체이든 유공이 걸프오일로 넘어가는 마당에 걸프오일 측 부사장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꺼림칙했다.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을 때 어떤 인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내가 걸프오일과 짜고 운영권을 걸프오일에 넘겨주었다고 중상했다. 그의, 중상은 매우 교묘했던 모양으로, 박 대통령은 나를 유공을 팔아먹은 비열한으로 생각하고 나를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나를 구속하기 위한 절차로 감사원에서 감사가 나왔다. 모든 서류와 장부가 접수되었고, 운전기사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를 도와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성정자 씨 등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밤새 조사를 받았다. 감사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 번이나 되풀이 되었으나, 그들은 나를 구속할 만한 단서를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걸프오일 사장 힐 보닌(Hill Bonin) 씨는 영문도 모르고 나를 유공의 수석부사장으로 대통령에게 천거했다. 대통령이 펄펄 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나는 1970년 8월에 유공을 사임하게 되었다. 석유화학단지 조성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 준공식을 마치고 공장을 시찰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그 왼쪽으로 나와 이성호 사장이다

자리를 뜬다는 것보다 일을 하다말고 나오게 된 것이 나에게는 더 아쉬운 일이었다. 정유 및 석유화학 산업의 중요성과 그것이 국가의 경제와 장래에 미치는 영양 등에서는 아무런 식견이 없었으면서 사적인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중상을 당하고, 20년을 키워온 꿈의 실현을 앞에 놓고 이것을 외국회사에 넘겨주게 된 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씁쓸하였다. 그러나 나는 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끈기 있게 도전하고 매달리는 성격이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본 후에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않는 성격이었다. 나는 권력과 돈의 거래로 엉망이 되어 버린 나의 꿈을 뒤로 하고 새로운 출발을 구상하였다.

다행히 대통령과 가까웠던 윤치영, 이주일, 비서실장 김정렴, 보안사령관 김재규 씨 같은 분들은 전민제가 걸프오일을 업고 부사장 자리를 탐낸 게 아니라 운동을 한 일도 없다고 극구 나를 옹호해주었고, 그동안 내가 정유산업을 위해 얼마나 사심 없이 헌신했는가를 대통령에게 설명해주었다.

김재규 씨와는 그가 호남비료의 사장으로 있을 때 내가 고문으로 일 하면서 약 2년 동안 함께 일한 사이였고, 김정렴 씨는 그가 상공부장관을 지낼 때 내가 석유공사 설립을 위해 뛰어다니면서 자주 만나 알게 된 사이였다. 두 분 모두 공사가 분명한 존경할 만한 분들이었다. 중상모략으로 인한 박 대통령의 나에 대한 오해는 그 분들 덕분에 풀렸고, 후일 대통령이 다시 나를 찾게 되는 게기를 만들어주었다.

석유공사를 그만둔 뒤 나는 아내와 함께 세계 일주여행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오랜만에 휴식이기도 했고, 그동안 소홀하였던 가정으로 관심을 돌리는 계기이기도 했다. 내 나이 48세였고,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