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일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전 한국고분자학회 대한화학회, IUPAC회장
산업계출신 화학회장
이당 전민제 전 화학회관 이사장님은 항상 참 어른의 모습으로 나를 감탄시키셨다.
필자와 20년의 차이 때문에 이사장님을 가까이서 뵈올 수 있는 기회는 나에게 조금 늦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대한화학회 주최로 ‘87 ASCHEM SEOUL’ 이라는 이름의 제2차 ‘Asian Chemical Congress’와 제4차 아시아 화학연합회(FACS) 총회를 tj울 롯데호텔에서 1987년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5일간 개최한 바 있다. 이 대회 준비를 위한 조직위원회 사무처장(조직위원장 ; 최상업, 사무총장 김시중)의 책무를 지고 있던 터라 여러 선배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다. 전 이사장님은 제 21대 대한화학회장(1986. 9.~1987. 8.)으로 계셨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아마도 남기종 선생님(1977~1978, 화학회 16대 회장)을 제외하고 산업계출신으로는 두 번째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 학회장이라 믿는다. 항시 과묵하시고 말씀을 아끼면서도 꼭 필요한 것, 후배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것들을 조용히 챙겨주시던 모습에 감탄하였다.
이후 1996년 9월 1일~6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9차 IUPAC 국제회의 CHEMRAWN의 조직위원장으로 모든 일을 이끌어 가실 때도 똑같은 모습이어서 재삼 감탄하였다. 이때 필자는 조직위원회 멤버로 자주 국제대회 준비 및 진행사항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대회를 통해 전 이사장님께서 보여주신 IUPAC에 대한 관심과 애착에 매우 놀랐다. 우리나라가 1963년에 IUPAC 회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대한화학회 회원으로 IUPAC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예는 별로 없던 터였다. 그러나 전 이사장님께서 보여주신 IUPAC 내의 활동은 지금까지도 IUPAC 임원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이당께서는 1987년에 IUPAC 총회에 참석하신 이래 대부분의 IUPAC 총회에 참석하셨을 뿐만 아니라 1995년부터는 IUPAC의 COCI와 CHEMRAWN에서 큰 활약을 최근까지 해오셨다. 대한화학회 회원들의 참여와 활동이 저조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하시던 이당의 심정을 IUPAC 고분자분과회의 IUPAC 전체 회장을 지낸 본인으로서는 너무나 깊이 동감하면서 후학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학계에 직접 몸담고 계시진 않으시면서도 국내외 여러 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셨고, FACIFICHEM 등에서 우리나라 화학고업의 역사 및 현재에 관한 발표를 꾸준히 해오신 학구적 태도에 그저 머리 숙여질 뿐이다.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 산업계에 더욱 많아야 할텐데….
이당의 학회사랑
이당의 학회에 대한 사랑은 정말 남다르시다. 현 한국화학회관 건립준비 시 1969년에 Gulf사로부터 받은 6만 달러를 기증하였고(이 돈은 당시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이며 내가 느끼기에는 걸프사가 이당 개인에게 ‘한-Gulf’ 협력을 위해 기울인 노력의 대가로 지출한 것이 아닌가 싶으며, 이당이 선뜻 회관건립기금을 위해 기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 안동혁 박사님에 이어 1990년부터 회관의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2006년에는 3층 건물을 현 5층 건물로 증축하시고 내부 수리도 끝내 대한화학회와 한국화학공학회가 회관에 다시 둥지를 틀수 있게 해주셨다.
이당께서는 회관 증축 준비과정 중 뒷 건물주가 회관 소유 부지 일부를 잠식했음을 알게 되셨다. 고려대학교가 예전에 공중촬영한 사진의 도움을 받아 잠식당했던 부지를 다시 회수할 수 있었던 법적 절차를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밟고 계셨던 이당의 참을성과 후학들을 위한 희생정신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필자를 포함해서 전 학회 회장들과 임원들은 도대체 무엇하느라고 부지가 사라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이당께서는 1990년부터 한국화학회관 이사장으로 회관을 돌보고 계시다. 본인은 이사와 감사의 책임을 맡아 이사장님을 도와왔다. 회관의 역사를 잘 모르는 후배들은 깊은 이해가 부족한 채 재단법인 화학회관의 존재를 거북스럽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이를 안동혁 선생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아, 회관 정리해 버리지. 왜 그리 골치를 썩이면서 고집스럽게 회관 짐을 지고 있지?” 나는 안 선생님이 이당께 던진 말씀을 옆에서 듣고 짐짓 못들은 양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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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일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IUPAC회장 [출처 ; 고려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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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께서는 요즘도 대한화학회가 잘 성장하고 있는지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계시다. 금년에는 회관 지하를 깨끗이 정리하여, 화학인클럽을 시작하셨다. 어느새 냉장고와 컴퓨터도 준비해놓으셨고, 냉장고를 시원한 맥주로 가득 채워놓으셨다. 퇴임한 화학자들의 훌륭한 모임장소가 될 것을 기대한다. 화학회관 이사로 계신 정봉영 교수가 열심히 돕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이당과 나 개인 사이에 빼놓을 수 없는 잊지 못할 일이 또 있다. 지난 2007년 8월, 이태리 토리노에서 있었던 IUPAC총회에서 본인이 차기 회장(2008-2009)으로 당선된 후 귀국해 전 이사장님께 그 말씀을 전해드렸다. 어찌나 반가워 하시든지, 급기야 사모님과 함께 축하 점심까지 초청해주시는 영광을 베풀어 주셨다.
거기에 덧붙여 IUPAC 회장 사무실이 필요할 터이니 화학회관 내에 공간을 찾아보자는 말씀이셨다. 누구나 그렇듯 대학교에서 퇴직 후 사무실 마련이 깜깜했는데, 이 말씀은 나에게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말씀과 같았다. 그래서 이 글도 회관 3층에 마련해주신 IUPAC 서울 사무실에서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깊으신 배려를 참으로 고맙게 여길 따름이다. 나는 이 고마움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IUPAC 임무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안동혁 선생님에 대한 이당의 존경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회관 3층에 명예의 전당(고려대학교 정봉영 교수가 큰 도움을 주었다)을 마련하여 안 선생님의 족적을 잘 정리해 후예들이 좋은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게 해놓으셨다. 필자가 듣기에는 회관 건립당시 건물명칭을 안동혁기념관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안동혁 선생님께서 마다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선생님의 일대기 ‘화학계의 선구자 제1편 안동혁 선생’(2003 발간)을 준비하느라 이당과 힘께 과천으로 안 선생님 댁을 찾은 적이 있다. 안 선생님의 박학다식에 놀랄 따름이었고, 온화하신 사모님의 정감이 거처에 가득히 채워져 있음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안 선생님의 첫 번 녹음을 마치고 나올 즈음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아무 말씀 없이 봉투 하나를 거실 장롱 서랍에 슬그머니 넣고는 신을 신던 이당. 어른을 위한 배려의 태도에 절로 나는 머리를 숙였다. 이당의 큰 뜻 덕분에 ‘화학의 선구자’ 시리즈가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제2편으로 이태규 선생님의 일대기가 2008년에 출판되었다. 현재는 제3편 김동일 선생 편이 준비 중이다. 역사의 중요성을 후학들에게 깨우치시려는 이당의 큰 뜻의 결과물들이다.
이당의 나라사랑
이당의 나라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 두어 가지를 덧붙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첫째는 6.25의 총성이 한창인 1950년 11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안동혁, 최웅, 윤주복과 함께 흥남화학공업단지를 시찰하여 공장도면 및 실제도면을 가져오는 위험을 무릅썼다. 총성이 가까이서 들리는 데도 원래 계획된 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자료를 더 모은 후 시찰단의 귀경을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해 겨우 동경행 미군 비행기를 얻어 타고 여의도로 오게 된 얘기는 마치 전장의 무용담을 듣는 듯하다.
그때 가져온 자료의 일부가 화학회관 5충 명예의 전당에 사진으로 전시되고 있다. 둘째는 세계에 성유파동이 밀어닥치자 이당은 1973년 및 1975년 두 번에 걸쳐 대통령 특사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한국에 대한 지속적 원유공급을 확약 받은 민간외교를 성사시켰다. 이 두 얘기는 이당이 조국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진 훌륭한 역사적 공헌을 말해주어 후학들에게 웅변하는 바 크다.
이당께서 어느새 90세에 이르셨다. 국내의 학회 일에 관심이 크실 뿐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을 항시 염려하고 계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 어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부디부디 계속 건강하시어 아름다우신 백수를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