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림 재료학회장, 연세대 공과대학 신소재학부 교수
전설적인 정유맨
전민제 전인터내셔녈 회장은 정유업계에서 ‘전설적인 정유맨’으로 통한다. 그는 1949년 북한이 전기를 끊으면 암흑천지가 될 정도로 공업이 전무한 우리나라에 정유공장을 세워야한다며 11년 간의 투쟁 끝에 1964년 국내 첫 정유공장인 울산정유공장을 가동시킨 한국정유산업의 시조이다.
전민제 회장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 출범에 이어 1964년 2월, 하루에 3만5000배럴의 원유를 정제할 수 있는 울산 정유공장이 시운전에 들어간 날을 잊지 못한다. 1963년 말 울산 정유공장이 완공됨에 따라 석유류의 공급가격이 종전의 절반이 됨으로써 산업에 필요한 에너지가 저렴하게 공급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1946년 자본금 2000만원으로 아세틸렌에서 빙초산을 만드는 현대적 화학공장 1호인 조선종합공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해방직후 인프라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안동혁, 이태규 박사의 도움을 받아 공장을 가동했지만, 1948년 북한에서 전기공급을 끊자 공장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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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홍림 재료학회장, 연세대 신소재학부 교수 [출처;연세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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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부터 전민제 회장은 석유화학산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부상하는 석유화학의 중요성을 목격하고 석유화학이 미래산업이 될 것을 예측했다. 특히 에너지 보존자원이 없는 남한에서 먹고 살려면 원유를 이용한 석유화학공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으로 한국이 초토화되면서 그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한에는 화학공장이라고 해봐야 삼척의 가성소다, 카바이드, 시멘트공장이 전부였습니다. 3년간 동경대 생산기술연구소에 파견돼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석유화학공업의 기반을 닦기 위한 구상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석유화학공업을 일으켜야만 우리나라가 잘 살수 있다는 확신이 선 것도 그때였지요.”
증류탑 하나에서 정유산업 밑그림
마침 1950년대 초 중동의 원유증산 바람은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화여대에 재직하던 사모님의 도움으로 김활란 박사와 자주 만났던 것이 게기가 되었다. 김활란 박사가 전민제 회장의 생각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한 것이다. 결국 그는 1951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석유화학 공장을 세울 것을 건의하는 기회를 갖는다.
“당시 미군 유류보급창이 있어 이미 철도와 항만시설이 갖춰진 울산에 정유공장을 세우는 것이 가장 돈을 적게 들이는 방법이었죠.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석유회사가 해방이 되자 짓다말고 떠나버린 증류탑 하나를 시작으로 확충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1954년 조선석유 임시관리로 임명되면서 그의 비전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울산과 서울을 오가며 정유사업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원조 당국을 설득했다. 수시로 미 공보원으로 학술지를 보러다니던 것도 이때였다.
“외국의 원조로 근근이 먹고사는 나라에서 정유공장을 짓겠다고 하니 다들 미친 짓이라고 외면했지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정유공장을 위한 원유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석유화학공업을 제안한 1951년부터 석유공사 설립까지가 힘들었지요. 인생의 황금기인 30대를 앞이 보이지 않는 일에 투자한 셈입니다.”
1959년 정부기구인 정유공장추진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500만 달러의 정부자금을 이끌어내고 한국석유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급물살을 탔지만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치자금으로 몰려 모두 환수되었다. 특히 남궁련 사장이 부정축재자로 몰리면서 관련 사업이 백지화되어 전민제 회장은 1년간 어두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1년간 사업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지요. 하지만 1961년 박정희 대통령에 브리핑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승인을 받으면서 정부사업으로 힘을 얻게 됐어요.”
정유공장 완공 - 방향족 화합물 생산
‘석유 한 방울이 피 한 방울’이라고 걱정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업생산제품을 수출할 경우 생산가격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3%밖에 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설득했고, 그러고나서야 석유화학산업에 시동이 걸렸다.
전민제 회장은 이어 대한석유공사법 개정을 위한 기초작업에 참여 1962년 8월 15일 대한석유공사 출범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초대 이사직을 맡아 부사장으로 은퇴하기까지 8년간 국내 정유산업의 밑그림을 그렸다.
“1951년 처음 정유공사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11년 만의 투쟁이 결실을 맺은 것이지요. 당시 미국의 한 해 원조가 1억2,000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정부와 민간 누구라 할 것 없이 원조가 끈길 것을 우려해 반대했지요.”
하지만 그는 대한석유공사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 등에서 결국은 자력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언제까지나 원조만 바랄 수 없다는 일념으로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했다.
우여곡절 끝에 석유공사가 설립되고서도 울산 정유공장이 시운전에 들어갈 때까지 순탄치 만은 않았다. 외국의 건설업체와 1962년 계약을 체결하고 1차 대금을 지불을 했지만 국고보유 달러가 없어 2차 대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스탠다드, 쉘, 걸프오일, 칼텍스 등 4개사와 접촉했다. 결국 1956년 외국 정유공장 시찰시 처음 인연을 맺었던 미국 걸프오일사의 실력자 크렌시가 2,000만 달러를 대한석유공사에 선뜻 빌려주었다.
“1962년 대한석유공사 이사부터 1970년 대한석유공사 부사장직을 떠날 때까지 많은 후배들을 길러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은퇴했지만 스무 살이 갓 넘어 공채로 들어온 S-Oil의 김선동 회장이 현직으로 남아 있는 유공출신입니다.”
1964년 정유공장 시(始)가동 후, 1970년 5월 벤젠, 블루엔, 자일렌 등 많은 방향족 화합물이 생산되던 날, 그는 마치 자식이 태어난 듯 기뻐했다. 국내에서 석유화학생산제품이 생산되기는 처음이었다. 하루 3만6,000배럴 규모의 울산 정유공장이 오늘날 60만 배럴로 몰라보게 성장한 것이다.
원유공급선 확보-엔지니어 양성
정유공장이 완공되자 196년부터 석유화학사업을 추진하며 울산화학단지 건설에 참여했다. 1970년 대 두 차례 석유파동 때는 중동외교 일선에서 뛰기도 했다. 1974년부터 한ㆍ사우디경제협력위원회 부회장으로 임명되어 정유공장을 설립하며 쌓아온 중동인맥으로 정유업계 실력자로 통하던 그는 최규하 당시 청와대외교특별보좌관과 함께 원유공급선 확보를 위해 사우디로 파견됐다.
“주유소 앞에 물통을 들고 주저 앉아 기다리던 당시 어려움이 컸습니다. 일본 사람들과 함께 사우디 왕을 만나 한국의 오일쇼크를 설명했지요. 열흘 간 세 번이나 중동을 왕복하기도 했습니다. 그 같은 노력 끝에 결국 암시장에서 기름을 사야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또 울산의 대한석유공사, 여천의 호남정유, 인천의 경인에너지에 이어 선경이 국내에 제4의 정유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1972년 정부인가를 받았을 때도 전민제 회장이 한국 측 실무를 맡아 중동을 드나들며 원유공급선 확보를 담당했다. 울산에서 대구에 이르는 송유관 건설 및 울산석유화학단지 기획과 조성 작업에도 참여했다.
1971년에는 공장을 설계할 수 있는 엔지니어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엔지니어링을 재창업해 국내는 물론 해외플랜트 건설에 참여했다. 이어 1973년 이수화학공업과 신한기공건설을 꾸려나가는 등 정유업계의 거물로 활약했다.
또 한국부식학회회장, 대한화학회 회장, 한국석유화학협회 부회장, 해외건설협회 이사, 기술용역협회 회장, 과학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 다양한 학회활동을 통해 후배를 길러내는 데 정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국제순수 및 응용화학기구(IUPAC) 화학산업 분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같은 경력의 그 이지만 화려한 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대한석유공사가 출범하기까지 한국전쟁까지 10여년 간 결코 화려하지 않은 그 시간 이후 정유공장이 들어서고 석유화학 산업이 일어나던 때보다 더욱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아흔이 다가온 연세에도 각종 학회참석을 위해 일본이며 미국을 오가는 전민제 회장은 부인 나영균 이화여대 영문학과 명예교수의 도움을 받아 한국의 산업사회 석유화학 발전사를 담은 책을 쓰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