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률(朴鍾律) | 전 유공 부사장, 유공가스 사장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1962년에 유학대신 대한석유공사(유공)를 택한 저의 선택은 옳았고 저희들의 유공은 아주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국내애서 정유 및 석유화학산업의 선발주자였다는 것이 보람 있었고, 걸프오일의 참여가 여러 가지 제약과 폐단을 끼쳤지만 훨씬 많은 선기능을 하였다는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의 SK그룹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에는 유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경영학자들의 평가도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유공에 입사하면서 Big boss로 이당을 만나 뵙고 인연을 맺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유공의 설립과 발전을 이끄신 분이 바로 우리들이 ‘영원한 보스,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는 이당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회고록 작성을 도와드리면서 유년시절부터 오늘에 이르는 그 분의 살아오신 길과 그 분의 방식을 새로이 배우게 되고 애착과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과학자, engineer, entrepreneur, 비즈니스맨을 총체적으로 종합한 거인이십니다.
이당께서는 저보다 14년이나 연장이신 대선배입니다. 14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시간상의 의미에 더하여 너무나 많은 의미에서 ‘엄청난’ 차이를 내장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고, 겪고, 느낀 것이 전부일 수도 없었고, 이당께서 회사에 재직하셨던 처음 8년 사이에 너무 많은 큰 일이 숨가쁘게 일어났기 때문에 제가 그 의미를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가 보고 모셨던 그 분에 대한 기억과 그 분을 모시며 얻은 폭넓고 다양한 배움을 정리하고 외람되게도 촌평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1962년 이전 - 신문기사에서 각인된 이름 세 글자
1958년에 저는 신문지면을 통하여 전민제(한미화학 상무) 씨라는 분이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접촉식 황산공장을 자체 설계, 건설, 운전한 공로를 국가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화학공학과 상급반이었던 저는 이러한 선도적인 노력과 성과에 감탄하였고, 전 민자 제자 이름 석자를 머리에 깊이 각인하였습니다. 뒤에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공장을 방문하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후학들에게 가능성을 일깨워주시고 영감을 준 의미가 큰 성과였습니다.
1962년 - 첫 만남, 먼발치에서 본 멋쟁이
1961년과 1962년에 걸쳐 우리나라 첫 정유공장의 건설과 운영을 위한 노력이 그 결실을 향하여 많은 진전을 보이고 있었으나 밖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한국화학공학의 창립총회(1962년 12월 서울대 의대 강당)자리에 친구 몇과 함께 참석하였다가 누군가 “저 분이 전민제 씨야.” 하는 말에 강당 입구 쪽을 바라보니 흑곤색의 트랜치코트를 입으신 잘 생기신 멋쟁이 신사 분이 회사 관계자 분들로 보이는 몇 분과 함께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서계셨습니다. 문 쪽이 환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대한석유공사에서 빅보스로 모시게 될 분이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고, 다만 자신이 넘치고 왠지 개선장군 같은 인상을 남기셨습니다. 이후 반세기에 가까운 긴 세월에 걸친 인연의 시작이었지만 인사도 드리지 못한 만남, 먼발치에서 일별한 순간이었습니다.
대한석유공사 입사 - 맨 바닥의 재시험을 요구한 완벽주의자
1962년 10월 13일에 대한석유공사(유공)가 설립되었고, 그 이후에 사원 공개 채용을 위한 입사시험이 있었습니다. ‘화공인’에게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정유산업의 국내 효시인지라 미국유학의 준비를 접고 산업의 길로 들기로 결심을 하고 저는 입사시험에 응하였습니다.
서울역 뒤에 있는 신광여고에서 시험을 치렀고, 합격하였다는 공고를 접하였을 때는 당연하지 하는 생각과 함께 미답의 미래에 대한 멋진 그림을 그렸습니다.
회사 사옥(퇴계로 한일 빌딩 신축건물)으로 합격자 소집이 있었던 날에 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민제 이사께 인사를 드리는 것은 기다리던 순서였으나 이사께서는 화학ㆍ화학공학 계열 합격자들을 상대로 뚜렷한 목적이나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이 직접 출제, 감독 하에 재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겨울에 아직 책상도 들여 놓지 않은 새 건물의 차가운 반짝이 시멘트 바닥에 앉고 엎드린 자세로, 혹 부정합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이를 걸러내시기 위한 완벽주의자다운 노력이시었는지 모르겠지만, 이후에도 재시험의 이유와 그 결과를 어떻게 이용하셨는지 궁금증이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1963년 - 신입사원 시절, 기획과
제가 근무하고 있던 군 연구기관에서 사표 수리를 거부하여 입사동기에 비하여 한 달 가량 늦은 1962년 말에 가서야 유공 입사수속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저는 기술계 부서가 아닌 기획부 1과(과장 최석환)에 배치되었고, 선망의 미국 기술훈련(섬유공장 설계ㆍ건설을 담당한 플로어사Pluor Coporation가 제공하는 기술ㆍ설계 훈련)에 참가할 수 있는 선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훈련분야의 결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사께서는 항상 화학공정을 이용하는 공장의 디자인ㆍ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종사할 수 있는 전문 인력 양성에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유공장의 운전ㆍ정비에 대비하여 정부에 제출할 해외훈련계획을 작성하는 임무가 기획ㆍ인사부서로부터 주어졌는데, 공장 조직과 담당업무에 맞추어 훈련분야의 인원을 정하여야 한다는 국장급 정부 당국자(미국 유학 및 충주비료 근무 경력)의 까다로운 요청이 있어 미국에 용역회사가 작성한 충주비료의 자료를 정유공장에 맞추어 번안하는 작업에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열중하였습니다.
해외훈련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어서 몇몇 동료(김대기, 문동민, 박종률, 이지용)가 밤을 새우며 ‘작품’을 써 내려 갔습니다. 결재라인에 계시지 않으셨지만 이사께서는 저희들의 ‘역작’을 일별하신 후 “저장ㆍ출하 담당과 펌프공도 넣어보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소설을 쓴 것에는 눈을 감아 주시고, 저희가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만, 비료공장의 창고ㆍ포장업무에 해당하는 정유공장의 업무가 ‘bulk oil' 취급업무인데 아예 관련한 조직ㆍ인원이 없는 것을 지적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이 부분을 어떻게 수정하고 가필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렇게 저희들의 ’작품‘이 완성되고 만족스러운 정부 당국자의 점수로 이어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때 만든 소설 같은 훈련계획은 외국합작선의 참여로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 초년 병아리들은 회사가 어떤 엄청난 난제에 부딪혀 있으며 무슨 중요한 변화의 큰 바람이 불어오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사님은 당신의 서류함 속에 있는 자료를 이용하여 <한국의 석유산업 Petroleum industry in korea>이라는 자료를 영문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직접 주셨습니다. 외국 합작 투자선들이 참고로 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라는 명이였던 것 같습니다.
짐작하건대, 이사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시간 안에 마칠 수는 없었지만 이 작업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 하의 원산 정유공장의 존재, 2차대전 종전 직전 시설 일부 울산 이전, 건국 이후 몇 차례에 걸친 국내 정유공장 건설 추진의 배경과 실패, 이런 가운데 이사께서 기울이신 일관된 노력과 역할을 볼 수 있었고, 그 결과 대한석유공사가 국영으로 출범하고 역사 어린 울산 부지에 국내의 첫 정유공장을 건설하기에 이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여러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