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동(金鮮東) | 미래국제재단 이사장
내 인생의 롤 모델
이당 전민제 이사님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대한민국의 현대 산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유산업의 개척자이자 석유화학 산업의 선도자, 엔지니어링 - 플랜트 산업의 ‘파이오니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전 이사님은 어떤 수사나 문자로 표현해도 손색이 없으신 분입니다.
전 이사께서는 작년에 미수를 가지셨으나, 나보다 20년 나이 차이가 있어 측근보다 한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주시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이사’라는 아이콘은 우리 ‘막내들’에게 있어 그 어떤 표현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히 친숙한 호칭입니다. 전 이사에 대한 기억은 근 반세기 전 경제개발을 통한 국가선진화를 목표로, 국가가 핵심사업으로 추진한 정유산업의 실질적인 효시이자 대한석유공사 1기 공채 모집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군 미필, 학사자격 미확실(초유의 국가시험 이전) 등 응시자격에 문제가 있었던 서울공대 화공과 최연소 3인방(당시 모두 20살이었다. 김철희, 윤창구, 김선동)은 전 이사의 배려가 없었다면 합격은 물론 응시조차 불가능했다는 후일담을 들은 바 있습니다. 우리 3인방의 입사시험 합격은 인재를 중시하는 전 이사의 과학도적인 혜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의 살벌하리만큼 엄격함을 기억하는 우리는 그렇게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가 지원했을 당시 대한석유공사 공채 1기 입사시험은 1차 필기시험 후 2차 구두시험을 거쳐 마지막 3차 필기시험까지 통과해야만 합격할 수 있는 어려운 관문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토록 수차례의 관문을 만들어 입사지원자들을 힘들게 하셨던 것도 인재선발에 대한 전 이사의 고뇌와 열정이 남다르게 특별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정자 과장을 비롯해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칠 줄 모르는 설득력과 모든 측근들을 압도하는 과학도적인 기술지식, 몇 단계 미래를 내다보시는 혜안 등으로 앞장서 이끌고 가는 리더십, 전 이사는 이처럼 당시 새내기 사원의 눈에는 가히 입지전적인 ‘전설’이자 ‘우상’이었습니다.
이런 분을 지도자이자 선배로 가까이서 모실 수 있게 됨에 따라 나 역시 전 이사의 도전적인 추진력과 과감한 결단력은 물론, 전 이사께서 일을 추진하고 결정하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시 한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까지 배울 수 있었으니 전 이사는 내 인생의 롤 모델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10년이 채 안 되는 젊은 시간에 대한석유공사는 ‘grass root(최초시설) 정유능력’을 비롯해 용어도 생소했던 revamp, expansion, revamp를 거쳐 5배의 대형 정유회사로 성장했으니 이 또한 전 이사의 노력과 열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현대문명의 핵심사업이자 석유화학의 두 축인 aromatic(방향족) 시설과 olefin(지방족) 시설 등을 구축해 미래지향적 정유산업의 토대를 이끌어온 전 이사의 리더십과 혜안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롭기만 합니다.
|
|
| ▲ 전민제 유공 부사장이 공해관련 토론에서 발언한 내용의 기사 (매일경제 1970. 6.27.) |
|
덧붙여 말하자면 이런 공적을 이뤄낼 수 있었던 데에는 전 이사님의 글로벌 마인드와 시각도 단단히 한몫 했습니다. 지금이야 글로벌화 된 기업인과 기술인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때는 글로벌 마인드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때 아니었겠습니까!
전 이사님의 글로벌 마인드는 이어 UOP의 핵심 기술 도입을 비롯해 Fluor, JGC 등의 서비스 활용, 걸프오일의 자본과 원유확보 등 국가 정유산업 선진화의 초석을 다짐은 물론, 원유 한 방울 생산되지 않는 우리나라가 오늘날 세계적인 규모의 정유산업 시설을 갖추고, 수출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까지 이끌어 준 것입니다.
‘연구자’이자 ‘과학도’로서의 전 이사님에 대한 기억도 또렷합니다. 기출자료에 대한 정열적인 집념으로 정유산업과 기술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것도 모자라 그 자료들을 직접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기까지 하셨습니다.
전 이사님의 이런 모습에 주위 사람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상식을 초월한 과학도적인 명석함과 열정적인 집념 때문에 때론 주변의 질투어린 시선도 많았지만 자기 희생적인 자세로 일관하셨던 ‘전 이사’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전 이사님의 이런 과학도적인 열정이 엔지지니어링 부문과 프로젝트 건설 등을 산업화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셨고, 정유산업을 오늘날 우리나라의 1등 수출산업으로 굳힐 수 있게 했으니 전 이사님을 정유업계의 진정한 파이오니아라고 칭하는데 어느 누가 이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업무영역을 벗어나 사적인 면에서도 전 이사님의 과학도적인 면모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기셨습니다. 전 이사께서는 주변에 좋은 이공계학자가 눈에 띄면 그들에게 남다른 관심과 물질적인 지원을 해오셨습니다. 이를 알게 된 나는 혹시 ‘당신이 이룰 수 없었던 학자에 대한 꿈을 후배들이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러시지 않았나’ 하고 혼자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전 이사님의 농장에 초대된 나는 농장 내에 갖춰진 기술자료관과 실험실 건물 등을 볼 수 있었는데, 앞서 한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미수연에서 전 이사님을 다시 뵈었습니다. 그 옛날 ‘전 이사’의 총기와 혜안이 그때와 사뭇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 나는 몹시 기뻤습니다. 회고록을 준비하시는 중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찬욱 선배는 나에게 전 이사님에 대한 소견을 정리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습니다. 김 선배의 권유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인사치레로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자격이 없다며 극구 사양했었습니다.
내가 전 이사님을 아주 가깝게 모신 적은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한 발 떨어져’ 좀 더 객관적으로 쓸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과 김 선배의 계속된 권유로 ‘전 이사’님에 대한 내 기억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곧 고희를 맞게 되지만 대 선배님들 앞에선 아직도 ‘풋내기 막내’이기만 한 우리 3인방, 그 중에서도 막내인 내가 ‘대한민국 정유산업의 파이어니아’ 전 이사님의 회고록 중 일부를 장식할 수 있게 된데 대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큰 돈을 버는 사업가로서는 성공을 못하셨는지 모르지만, 지난 세월동안 당신께서 이룩하신 사업이 모두 이 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생산토록 하는 든든한 기초가 되었으니, 전 이사님을 정유산업의 개척자, 석유화학산업의 선도자, 엔지니어링 - 플랜트 산업의 파이오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 이사’ 선배님의 여생과 내생에 큰 즐거움과 행복이 충만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존경하는 후배 김선동
2011.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