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달(許達) | 한국코칭센터 리더코치
1966년 여름의 일이다. 빌려 입은 반팔 카키복, 하사 계급장에 뒷주머니에는 Aristo 계산자를 꼽고 일신국민하교 교실에 입실하여 유공 입사시험을 치렀다.
지금도 떠오르는 것은 걸리버 소인국에 온 것 같던 그 낮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곰보투성이 책상 면이었는데, 답안 좀 쓰려고 하면 시험지에 구멍이 나고 걸리고 하여 도무지 시험에 몰두할 수 없을 만큼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시험공부도 안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성의 없이 시험을 끝내고 광주 송정리 부대로 귀대, 붙기는 다 틀렸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중대본부에 전보가 왔다. 유공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보였다. 붙었다는 기적도 기뻤고, 시험 치러 간다더니 떨어진 것 아니냐고 쑥덕거릴 중대본부 인사계 앞에 은근히 뻐겨줄 수 있어 좋았지만, 무엇보다 제대 말년 휴가 다 찾아먹은 참에 눈속임 출장 아니고 정식으로 또 한 번 서울 갈 기회가 생겨 너무나도 반갑고 기뻤다.
자! 서울에는 올라왔으나 이제 면접을 보러가려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입고 갈 양복 한 벌도 없지, 부대에서 아이들하고 장난하다가 앞니가 부러진 것은 또 어쩐다, 앞니 빠진 생쥐 같은 꼴 일터이니 면접시험관들이 좋게 보아줄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죽으라는 법도 없어서 양복은 속성맞춤으로 때우고, 앞니 역시 속성 가(假)의치 하나 해 넣어서 해결을 보고 당당하게 면접시험에 임했겠다. 그런데 첫 면접시험관의 말씀이 영 아니었다.
처음 인정(人定)질문이 있고 나더니 한 시험관이 묻는다.
“대학은 어딜 나왔나? - 다 써 있겠구먼. 왜 묻는다지?
“서울대 화공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는?” - 그것도 원서에 있구먼요.
“서울고등학교입니다.”
그랬더니 본론이 나왔다.
“서울고 나오고 서울공대 화공과 나왔으면 말하자면 수재인데, 입사시험 성적이 이게 뭐지?”
“......” - 대답 못하고 미소로 때울 수밖에.
그때 다른 시험관님, “아직 제대 전이고 현역인가?” - 이게 웬 구세주인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시험공부도 할 여가가 없었겠구먼...” - 이번에는 면접관님이 미소를 지어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면접시험은 전민제 이사님이 임석하여 주관하셨다고 했는데, 나를 구원해주신 분이 그 분은 아닐테고 아마 거기 계셨던 대학 선배 어느 분 아니었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어느 분들이 있었던지 전혀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전민제 회장님도 기억하시지 못하겠지만, 그분과 나의 첫 대면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966년 10월 신입사원 시절 문인일 과장 휘하의 ‘설계과’에 첫 배치된 신입사원 나와 조정남 군은 문동민 선배가 이끄는 ‘Lube Oil Blending Plant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울산공항에서의 10A 블록까지 오는 Base Oil 파이프라인 상세 설계를 고참 설계사 김인호 씨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제도판 위에서 그려 넣는 중인데, 전민제 이사께서 설계과로 내려오셨다. 문인일 과장한테 볼일이 있으셨던 모양인데, 꾸부정하고 어색한 자세로 제도판 앞에 앉은 우리가 눈에 설었던 모양이었다.
“저 친구들 지금 무얼 하고 있지?”
“파이프라인 설계 중입니다.”
“설계?”
곧 문 과장이 이사실로 불려가고, 세월 좋던 ‘설계과’ 시절은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 공장을 가보지도 않은 애송이들에게 설계를 맡기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불호령을 듣고, 다음날로 ‘울산건설사무소’ 전출 파견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전민제 회장님과의 두 번째 대면이었던 셈이다.
1969년 봄 윤진만 과장 밑에서 ‘공장설계과’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기술부장이 되어 있던 문인일 부장이 나를 부르셨다. 느닷없이 미국인 Barnes 부장과 인터뷰를 하라는 것이었다.
영어는 읽고 쓰는 것이었지, 외국인과 회화라고는 한 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는 나였다. 식은 땀 나는 “Oh, Yes, Haha" 인터뷰를 끝마치고 어리둥절해 있었더니 ‘석유화학 프로젝트부’로 발령이 났다.
발령이 났다고는 하지만 덩그렇게 넓은 방 안에 칸막이 Barnes 부장 방이 만들어져 비어 있고, 그 앞에 빈 비서 책상이 하나, 그리고는 내 책상이 마련되어 있는 빈방이었다. 그래서 나 홀로 프로젝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프로젝트 주요 멤버인 박종률 차장, 김정석 과장, Barnes 부장 모두 미국 M. W. Kellogg사에 출장 중, 서울의 기술부, 확장사업부, 공장, 석유화학부 등과 연락업무를 담당할 요원이 필요했으므로 내가 차출된 케이스였다.
Mr. Barnes로부터 ‘Terry'라는 강아지 이름 같은 영어 별명 하나 얻어 갖고, 타자수 한 명을 ’확장사업부‘에서 빌어다가 업무연락을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해보면 밤새 뉴욕에서 박 차장, 김 과장, Barnes 등 각자가 지시해오는 심부름 일이 긴 텔렉스 또는 케이블로 몇 장씩 쌓여있었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었다는 것을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텔렉스 내용을 먹지 넣어 타자 쳐서 열 곳이 넘는 부서에 배포하고, 뉴욕 요원들이 잠 주무시는 서울의 근무 시간동안, 문인일 부장님, 성정자 부장님, 공장의 해당 부장님 등 까마득한 선배님들과 연락을 취해서 그 분들의 코멘트를 저녁때가 되면 텔렉스로 만들어 보내는 것이 내 일과였다.
그 날의 텔렉스를 다 써놓고 보면 저녁 10시가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덕분에 마지막 학기 논문만을 남겨 놓고 있던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중도하차했다. 다행히 부장님들이 좌충우돌하는 내 고충을 잘 이해해 다른 일 다 젖혀놓고 만나 주셔서 그런대로 연락관 업무를 제법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될 쯤이었다.
갑자기 부사장실에서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전민제 부사장께서 나를 직접 호출하셨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대외문서를 기안하려면 전결규정에 의거 전결권자가 서명하여야 회사의 대표자명의 공문이 발송되는데, 석유화학 프로젝트의 경우는 기안자인 내 위로는 아무도 서명권자가 서울에 없으므로 부사장실까지 보내서 서명을 받아오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 중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옷을 가다듬고, 머리 만지고 비서실로 내려가니 비서실 비서였던 정성희 양이 의자를 가르키며 앉으라고 하더니 냉수 한 잔을 권했다.
“이건 뭐죠?” 하고 시선으로 물었더니, “박종률 차장님은 부사장님 뵙기 전에 한번, 뵙고 난 뒤 한번 꼭 냉수를 달라고 하시던데요.” 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인사를 드리고 조심조심 눈을 들어 바라보니, 부사장님 앞에는 그동안 내가 뉴욕과 주고받은 텔렉스의 타자본 카피가 여러 장 쌓여있었다. 이크 이거 뭐가 잘못이 있었구나.
“이봐, Barnes가 자네 부하야?”
부사장님이 텔렉스 한 장을 들고 말하셨다.
“이렇게 쓸 수 있는 건, 상관인 부사장이라야 할 수 있는 거여.”
그러더니 얼은 내 당황해하는 눈치를 살피신 듯 뜻밖의 다정한 목소리로 바꾸셨다.
“잘 못하고 있다는 건 아니여. 아주 잘하고 있긴 한데, 이런 표현은 주의하라는 뜻이지.”
의자에서 일어나시더니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전민제 회장님과 세 번째 대면의 기록이다.
방문을 나와 비서실의 미스정에게 내가 냉수 한 잔을 청해 마셨을까, 읽는 이의 추측에 맡긴다.
울산 나프타분해센터 부지에 대한 외국인 지질조사 전문가가 다녀가고,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던 프로젝트가 어느 날 청천벽력으로 갑자기 중단되더니, 한동안 이런저런 암초에 걸려 지지부진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분해로 기본 설계를 맡게 된 주 용역자 M. W. Kellogg사에 대하여 Dawnstream 업체인 Daw / 한양화학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고 한다. 그런 점도 있었겠지만 유공의 합작선이었던 걸프사는 원유판매를 위한 정유사업에 뜻이 있어 한국에 합작투자를 한 것이었으므로 당시 우리나라 정부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추진하던 석유화학 공업 추진을 위해 유공이 맡아 건설해야 할 나프타분해시설은 별개 관심사라는 입장이었던 유공 내부 사정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