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진 공간 (1)

전수현(Soohyun Sohank) | 큰 딸

굽어진 공간

아버지는 말씀이 많이 없으신 분이지만 큰딸인 나에게는 가끔 사업관계의 일화를 들려주곤 하셨다. 어떤 얘기는 우습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심각하기도 했다. 이 글을 쓰려고 앉았을 때 두 가지 일화가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한국 전쟁 후 미국의 셀라네스(Celanese)사가 아세테이트 레이온 공장을 세울 사업계획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아버지를 불러 아세테이트 레이온 공장을 맡아 운영해보지 않겠냐고 물어 보셨다. 아버지는 한국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아세테이트 레이온처럼 고급 섬유를 더구나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섬유공장을 짓기보다는 국민의 근본적 피복소비를 충족시키는 면방직을 일으켜야 한다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이 박사는 공장을 하게 해 준대로 싫다는 이상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웃으셨다고 한다.

또 한 일화는 유공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이 월남전에 대규모로 개입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일본과 한국 외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정유능력이 있는 나라가 없어서 에너지 공급원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포착하셨다. 그 기회를 이용해 월남참전 미 공군의 제트기 연료를 거의 전량 공급하는 계약을 따내셨다고 한다.

그때 울산 공장에 케로신(Kerosene) 처리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시설을 당장 설치하여 제트기 연료의 공급이 가능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창조적인 관점에서 사업기회를 포착하고, 공장도 없는 상태에서 계약을 따내는 과감성과 자신감을 가지신 아버지를 나는 슈퍼맨처럼 동경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가 보스로서 힘드신 면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할 기회도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80년 중반에 아버지 사무실 운영을 도와드리려고 1년 쯤 넘게 한국에 나와 있었다. 당시에 아버지는 전엔지니어링, 신한기공, 이수화학을 모두 대우에 넘기시고 컨설팅을 위한 개인 사무실을 열고 계셨다.

유공 시절에도, 전엔지니어링 시절에도 직원들에게 아버지는 힘든 보스로 유명하셨다. 어떤 때는 엄마가 옆에서 보시고 걱정을 하실 정도로 직원들을 야단치시고 일을 심하게 시키시기도 했다.

나도 한국에 나와 아버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아버지를 보스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험을 했다. 제일 힘든 것은 아버지 관점에서 이해가 안 가시는 애로사항이 있어 일을 못할 때는 호되게 야단을 치시는 것이었다. 야단을 치시는 게 너무 심해서 변명, 설명의 여지도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렇게 힘든 보스라면 딴 분들은 어떻게 아버지를 모셨나 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아버지가 부럽다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내가 공간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살고보니 공간이 굽어져 있구나”라고 하신 말씀이 인상에 남는다.

아세테이트 레이온이 그때 후진국인 한국에서 시장성이 없고 시기상조라는 분석의 원칙에서 설립된 전엔지니어링, 신한기공, 이수화학은 이익이 많이 남는 회사들이었다. 자본시장과 기술노동시장이 정립된 선진국에서 설립되었다면 주식 상장회사로서 크게 각광을 받을 가능성을 가진 회사들이었다. 기술의 기반부터 다져서 부가가치가 높은 기업을 육성해야 회사의 이익도 많이 남고 나라의 경제기반도 튼튼히 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정열을 쏟아 키우신 회사들이다.

▲ 큰 딸 수현과 리차드의 결혼을 축하해주신 박태환(인하대 총장) 박사와 담소를 나누는 필자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은 한국 최초로 석유화학 산업의 일부인 이수화학 알킬벤젠 공장을 설계부터 공장건설까지 자체기술로 지었다. 이수화학 공장 준공식 날 아버지는 공장시동이 안 될까봐 잠을 못 주무셨다. 지금 개발도상에 있는 중국 인도의 발전궤도를 보면 국민 소득증대를 동반해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소비전반에 쓰이는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생산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출산업에 전념하던 그 당시 석유화학 원료생산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을 왜 같이 세우셨는지도 최근에 와서야 이해가 된다. 공장설계와 공장건설을 수직 병합한 기업구조의 장점을 깊이 감안하신 것 같다. 설계와 공장건설에는 예상치 못한 방응요인들을 반영하기 위해 건설도중에도 여러 번 설계를 바꾸어야 한다. 어떤 구조 안에서는 설계와 공장건설의 긴밀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수직 병합이 경쟁에 유리하다. 하지만 미국의 엔지니어링 회사들은 인건비가 비싸서 설계는 본국에서 하고 공장건설은 동남아 국가들에게 하청을 주고 있는 형편이다.

이때 한국의 싼 인건비와 건설비를 이용하여 수직병합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세계 엔지니어링과 건설계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계획하신 것 같다. 그 의도를 직접 여쭈어볼 기회는 없었으나 한국사회 후진ㄱ성과 상식을 훌쩍 벗어나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시는 아버지가 나는 항상 부럽다. 한국의 기술 능력이 선진국에 비해 많이 떨어진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계셨지만, 또 한 면에서는 기술을 깊이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으셨다.

굽은 것을 피려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한참 사업을 하실 때는 한국경제와 자본시장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서 사업자금 조달이 힘들 때였다. 정부는 외환 확보가 긴급해서 수출산업 육성에 전념하고 있었다. 수출산업을 키우기 위해 이익이 많이 남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중간재를 수입해 들여와 조립한 것을 수출하여 매상을 올리면 정부로부터 수출자금을 받을 수가 있었다. 수출자금 증여가 배상액수에 병행했기 때문에 종간자재 생산이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은 국가 경제발전에 좋을 지는 몰라도 경제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수출산업 쪽에서는 이익이 많이 남지 않더라도 이자가 싼 수출자금을 많이 받아서 이자가 비싼 은행에 넣거나 사태시장에 돌리면 위험부담 없이 많은 돈을 벌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기술집약적 서비스산업이나 부가가치가 높은 중간재 생산 기술개발이 부족한 상태였지만, 이런 분야는 정부의 보호가 없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부의 정책을 이용하여 기업자금을 확보하는 데는 관심이 없으셨다. 이익으로 회사 경영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셨으며 장영자 사건 같은 사고가 터지리라고는 생각을 못하신 것 같다. 오로지 확고한 신념으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만을 걸으신 것이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공간이 굽어진 것을 몰랐다고 하시지만, 내거 보기에는 굽어진 공간을 직선으로 만드시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 계획대로 한국경제가 개발되었다면 최근 한국산업구조의 약점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