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 강인한 모순의 존재 ...

전수용 | 둘째 딸

퍼즐 맞추기

아버지의 미수(米壽)를 기념하기 위하여 논문집을 편찬하고, 또 이번에 출판하는 자서전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이란 가까이서 오래 살면서도 서로를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가 석황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준비하시고, 한국 석황산업의 기초를 놓는 작업을 직접 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세세한 과정과 수많은 난관들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유공이 창립한 해가 1962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이고, 유공을 그만두신 것이 1970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이다. 특별히 조숙한 편이 아니었던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오가는 단편적인 대화를 사태의 추이를 대강 파악하고 있었을 뿐 그 세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논문집과 자서전의 출판을 통하여 아버지가 살아오신 발자취를 확실하게 짚어볼 수 있게 되어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좀 당치않은 비유인지 모르나, 아버지의 존재를 퍼즐에 비교한다면 책을 읽고 나서야 아버지의 성품에서 이해되지 않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갈 수 있었다.

우리는 1남 3녀이다. 위로 딸에 셋이고 막내가 아들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커서 자기 일을 가지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받았다. 요즘은 여자아이가 못생기면 우스갯 소리로 “너는 공부 좀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말한다. 나는 꼭 못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건장한 체구에 여성적인 매력이 넘친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와 성품을 가졌다. 그 때문에 그런 길을 택하도록 하였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다.

대학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시집은 꼭 갈 필요 없으나, 박사학위는 꼭 해야 한다고 좀 더 구체적인 주문을 해오셨다. 사실 결혼은 안할 수 있으면 안 하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까지 말씀하셨다. 당시만 해도 대학 3, 4학년만 되면 선을 보기 시작하여 졸업하자마자 시집을 가는 것이 대부분 여대생들의 목표였던 때였다. 그러나 언니와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시집을 가라는 독촉을 받은 적도 없고, 미국 유학을 하기 위하여 집안과 투쟁을 할 필요도 없이 대학 졸업하자마자 가족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유학을 떠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여자가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으려면 자립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는 확실히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있었다. 나는 교수로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으며, 끊임없는 자기 실현의 장을 펼쳐갈 수 있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으며, 이런 삶을 준비해주신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그만큼 우상 파괴주의자이고 과학주의자이다. 합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신다. 이러한 사고의 습관이 아버지로 하여금 한국 산업의 미래를 위한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이 있었을 때, 그것을 믿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을 발휘하실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지식, 정보, 실력 등으로 돈과 권력, 패거리 문화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연장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그것도 일제말기, 광복, 6.25전쟁 등 한국현대사의 난관을 모두 겪은 어려운 시대를 살며 수많은 역정을 거쳐 온 분이기 때문에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조심성과 경계심이 대단히 많으신 분이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평하여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건너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 1983년 둘째 딸 수용과 남편 이수억

그런데 자서전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신중함과 완벽주의에 대한 답을 한 가지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빙초산공장 시범가동 날 있었던 탱크폭팔사건 얘기이다. 그만큼 화공학이란 분야가 용서가 없는 분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의 적당주의도 결국은 실패나 손해, 사고로 이어지는 기업의 현장에서 오래 일하시다보니 편하게 인생을 살아온 우리가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보이실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아버지는 결코 안정추구형의 인간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돈 한 푼 없이 20대에 화학공장을 짓고 석황산업의 미래를 위하여 월급도 못 받으시면서 몇 년을 뛰어다니는 일을 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또 한국 최초의 엔지니어링 사업을 일으키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창의적이고 과감하신 면이 있다. 그러나 절대 무모한 결정은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어려운 여건에서 사업을 하시면서도 항상 안정적으로 기업을 유지하셨고, 여건이 너무 어려워지자 무리하게 사업을 계속 하시는 대신에 정리하고 손을 떼셨다.

아버지는 과학자

아이들을 키우시면서도 아버지는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해주셨지만, 사치는 허용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실속 없이 값만 비싼 식당에 모시고 가면 불쾌하게 생각하신다. 항상 경제성을 생각하시어 쓸데없는 소비는 허용하지 않으신다. 집에서 팔꿈치가 나간 낡은 스웨터를 늘 입고 생활하시는 것을 보고 중국교포 가정부 아주머니가 중국에 갔다 오면서 스웨터를 사다드린 일도 있다.

남들이 모두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도 아버지는 인왕산 밑에 있는 강북의 주택을 굳건히 지키고 계신다. 현재 사시는 집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이다. 당시에는 거의 호화주택수준이었겠지만, 지금은 상당히 쇠락하고 불편하며 구조도 현대 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식과 양옥의 혼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산업한국을 일으키는데 초석을 놓으신 분이었지만, 아버지는 낡은 것을 확 밀어버리고 새것을 지어버리는 한국식 개발주의에 동의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자원의 낭비, 환경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경제개발에 앞장서셨던 아버지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환경주의적 산업모델로 눈을 돌리신지 20년이 되어온다.

아버지는 여가생활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신다. 취미생활도 없으시고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시는 일로 소일하신다. 가족들과 여가를 즐기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신 것도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유공시절,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시절에는 사업상의 여행을 하셨고, 대규모 사업을 그만두신 후에는 컨설팅이라든가, 연구결과 교류, 학회참석 등을 위한 여행을 주로 하셨다. 최근에야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하시던 인도의 타지마할이라든가 미국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들을 찾아보시기도 하시는데, 이것이 아버지의 생활에 생긴 변화라면 변화라 할 수 있다.

아버지는 특별히 재미있거나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시다. 그러나 항상 거짓 없는 과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독특한 유머감각을 발휘하실 때가 있다. 한번은 막내인 남동생이 초등학교 때 글짓기를 했는데, “선생님이 개처럼 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라고 썼다. 남동생으로서는 자기의 솔직한 인상을 쓴 것이지만, 보통 아이들은 선생님을 개에 비유하지 않는다. 나는 남동생의 이 독특한 상상력에서 아버지의 정직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불경스럽게,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바라보는 눈을.......

아버지는 모순의 존재이다. 극도의 경계심과 과감함을 동시에 가지셨고, 개발과 보존을 동시에 원하신다. 풍요 속에 절제하시고, 무미건조한 듯 하면서도 독특한 유어감각을 보이신다. 아버지란 존재는 그래서 재미있는 퍼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강인한 힘을 가지신 분이 아버지다. 지식과 혜안과 불굴의 의지로 집안과 나라와 세계의 미래를 걱정하는 영원한 맏아들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