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류탑 안에서 밤을 새운 나는 다음날 아침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갈아입을 옷과 주먹밥을 가지고 달려왔다. 아내는 오는 길에 여학교 동창생과 마주쳐 변을 당하는 줄 알았다고 숨죽여가며 말했다. 동창생은 좌익 거물의 딸인데, 6.25가 터지기도 전에 월북한 백금기라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여학교 동창 중에서 악질을 골라 처형 대상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내는 사상적으로 반동분자요, 자본가의 딸이니 악질분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짐작하여 사색이 되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매고 있는데, 마침 공습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집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내도 물론 정신없이 달아났다. 공습을 피한다기보다 백금기를 피하기 위해 달아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각기 나름대로 위기를 넘겨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큰 소리도 못 내고 속삭이는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는 신교동 집으로 갔다. 결국 혜화동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가 되었으나 남동생들도 그땐 이미 집에 못 있고 다른 곳에 가 숨어 있는 터였다.
나는 다음날로 안양으로 내려갔다. 잠시도 서울에 있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서울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를 찬양하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는 회의와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생활을 해야 했다.
안양에는 예부터 처가와 인연이 깊었던 농사꾼 김준배 씨가 살고 있었다. 김 서방은 전에 아내의 할아버지 집에서 일꾼으로 있던 이의 아들이었다. 한때 만주에 살았던 장인은 당시 당신이 맡아 하던 민청 공사 사업의 일환으로 김 서방을 데려다가 만주에 땅을 사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한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김 서방은 사대자라는 곳에 정착하여 줄곧 지내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나 일본이 퇴각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안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나는 마포에서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신작로를 따라 안양의 김 서방 집까지 걸어갔다. 그는 군말 없이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며칠 후 아내와 큰 처제가 뒤따라 내려왔다. 그들도 물론 걸어서 내려왔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두 다리밖에 없었다.
밖에서 보기에 빈집같이 보이라고 창문에 각목을 대어 못질을 한 방안은 낮에도 어두침침했다. 나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낮에는 천정 위에 올라가 지내다가 밤에만 방으로 내려와 잠을 잤다. 방에는 굶주린 빈대와 벼룩이 수없이 있어 우리가 눕기만 하면 맹공격을 가해왔다. 하는 수 없이 아내와 나는 좁은 좌탁(座卓)위에 올라가 잠을 자야 했다.
8월 하순 어느 날 낮에 밥을 먹으러 방에 내려와 있던 나는 정치보위부 부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는 의심스러운 듯이 내게 이것 저것 물어보더니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그대로 있다가는 잡혀갈 것이 뻔했다. 나는 다음 날로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안양에서 비산동을 거쳐 관악산을 넘어 흑석동으로 내려가 한강을 건넜다. 험한 산길이라야 사람들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갓집에는 장인 장모와 막내 처제 정균만이 남아 있었다. 처남 상균은 분천 큰댁에서 피신하고 있었다. 신교동에서도 나는 천정 위에서 지내야 했다. 끼니는 장모님이 주먹밥을 줄에 매달아 천정 구멍으로 올려 보내주었다. 찌는 여름에 천정위의 온도는 살인적이었다. 나는 대들보 위에 누워서 밤낮을 지냈다. 머리가 닿아 일어나 앉은 수도 없고 대들보의 폭이 겨우 40cm 정도여서 돌아누울 수도 없었다.
9월 중순이 되어 가던 어느 날 인민군이 신교동 집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이 집을 사령부로 쓸 터이니 식구들은 당장 나가라는 것이었다. 처가 식구들은 꼼짝없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쫓겨나고 나는 천정 위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장모님이 재빨리 올려 보낸 종이 쪽지로 사정을 알게 된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천장 위에서 굶어 죽거나 인민군에게 들켜 총살당하거나 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령부가 하루 만에 집을 비우고 나가는 바람에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 해병사단과 국군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던 9월 15일의 일이었다.
미군은 다음날부터 처갓집 근처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령부가 들어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웬일인지 떨어진 폭탄은 모두 불발이어서 땅속에 깊이 묻힌 채 40여년을 있다가 수년 전에야 동사무소 직원들이 전문가들을 데리고 와서 파내갔다. 그때 만일 폭탄이 터졌더라면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인천은 간만의 차가 극심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치밀한 계획 하에 만조 시간에 맞추어 2만 5천명의 한미 해병대를 일시에 월미도에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가히 천재적인 전략이었다.
인천상륙은 지금까지 남한에게 불리하던 전세를 보기 좋게 뒤집어 놓았다. 유엔군은 함포사격, 공군기 폭격 등의 지원을 받으며 서울을 향해 진격했고 미 7사단은 북진해오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만나 공산군을 협공했다. 이렇게 해서 9월 28일 서울은 수복되었다.
유엔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원산을 점령하고 이어 평양에 입성한 뒤 여세를 몰아 압록강에 다달이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제압했다. 우리나라 통일의 꿈이 곧 실현될 듯한 기미였다. 맥아더 장군은 북진하는 세를 몰아 압록강을 건너 만주까지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공군의 개입에 의해 무산되었다. 중국이 미국의 38선 이북을 장악할 것을 경계하여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미국 정부도 중국과의 정면충돌을 꺼려 결국 맥아더 장군을 1951년 4월 11일 해임시키고 매슈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장군을 후임으로 결정했다.
100만 중공군이 해일처럼 밀려오자 유엔군은 12월 초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유리한 전세를 믿고 ‘유엔 3인위원회’가 제의한 정전안을 거부하면서 계속 남으로 진격해왔다. 결국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1.4후퇴가 시작되었다. 공산당 치하에서 살아본 서울 시민들은 다시는 그럴 수 없다며 일찌감치 12월 초부터 피난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