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공업단지 시찰 (7회)

나는 11월 중순에 병기행정본부장 이종찬(李鍾贊)중장의 주선으로 흥남공업단지를 시찰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화학공장을 설계한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에 병기행정본부 고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북의 공업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었으며 병기행정본부에서는 당시 이북의 화학공업의 실상을 파악하고 싶어 했다. 그곳은 38선이 막힌 이래로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이었다.

당시 한국의 중앙공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던 안동혁 박사, 윤주복 씨, 마경석(馬京錫) 씨, 이건묵 씨, 최웅(崔雄) 씨가 일행이었다. 아직 전투가 계속되던 때라 길은 험했다. 원산 가는 길은 공산군이 진을 치고 있어 갈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울서 트럭을 타고 먼저 부산으로 내려가 성진(城津)으로 가는 군수품 수송선(LST)를 탔다.

우리는 저녁에 부산항을 떠났으나 풍랑이 심해 아침에 보니 아직도 배는 장전 앞바다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수송선은 바닥이 낮아 파도가 세면 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는 마침내 스크루를 공전시키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리 미 군함 한 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 배를 향해 정지신호를 보내다가 통하지 않자 문서통을 발사해 보냈다. 문서에는 “그 배는 지금 기뢰 위에 있으니 자력으로 빠져나가라”고 쓰여 있었다.

배는 두 시간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위험지대를 빠져나와 원산으로 향했다. 상륙해보니 원산은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이 처참하게 폭격당한 모습이었다. 트럭을 타고 천내리에 있는 조선질소(朝鮮窒素)의 알미늄공장과 시멘트공장을 거쳐 흥남공장으로 갔다. 조선질소는 ‘노구치 준’이라는 일본인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에 지은 것인데 이북에서는 2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도 일본인 기술자를 억류(抑留)하여 많은 봉급을 주어가며 공장을 운영하게 하고 공장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북정부가 공업을 얼마나 중히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도중에서 우리는 북상하는 미군 기갑사단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지명령을 내린 뒤 1시간 동안 전면을 향해 포격을 가하더니 인민군 2명을 잡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우리를 가게 했다. 이런 식의 전투가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튿날 우리는 함흥일대의 공장시설을 시찰했다. 역시 노구치 씨가 지은 본궁(本宮) 화학공장, 전해공장(電解工場), 원염창고(原鹽倉庫), 수은전류기실(水銀電流器室), 전해조실(電解槽室 4동 중 1동만 사용 가능), 합성염산공장(合纖鹽酸工場), 가성소다 농축공장, 조미료 공장, 염안(鹽安) 소다회(灰) 공장 부타놀(butano) 공장, 이소옥탄(iso-octane) 공장, 비료공장, 암모니아 합성공장, 황산공장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가히 한반도의 공업시설의 90%를 차지하는 함흥공업지대라 할만 했다. 그러나 그 시설들은 모두 폭격을 당해 대부분 처참하게 대파된 상태였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카바이드 공장이었다. 내 자신이 카바이드 공장에서 만든 아세틸렌에서 빙초산을 만드는 공장을 세웠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분말카바이드를 사용하여 아세틸렌을 발생시키는 기계가 사용되고 있었다. 분말 카바이드를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세밀한 공정을 요하는 것이었다.

▲ 6.25전쟁 당시 아동혁 박사 드과 함께 시찰한 흥남공업단지 / 사진은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공장 일부

원산의 정유공장도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공장은 하루 7,000배럴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당시 울산에 있었던 조선석유공장의 본 공장이라고 했다. 이것은 2차 대전 중 미군의 폭격으로 남방에서 원유를 수송해오기가 힘들게 되자 일본이 울산에 분공장을 세워 정유할 계획으로 증류탑을 하나 옮겨 놓았으나 그 시점에서 일본이 패망하여 계획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또 비료공장에서 나오는 비료는 소련으로 수출한다고도 했다. 이북 정부는 일본시대에 만들어진 공업시설을 2차대전 후 일관된 계획 아래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듯이 보였다.

또 해방 직후 서울대 공대 학장으로 있던 이승기(李升基) 박사가 일단의 제자들을 이끌고 6.25 때 월북하여 완성시킨 비닐 아세테이드, 비닐 알코올 공장도 조선질소공장 안에 있었다. 이승기 박사는 비닐 알코올을 가수분해(加水分解)하여 만든 실을 가지고 1939년 비날론이라는 합성섬유를 발명한 후 이를 대량 생산하여 이북사회에 의류재료로 공급했다. 한때 텔레비전에 비치는 이북 여성들이 모두 인조섬유 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파괴되긴 했어도 공장의 수도 많고 봐야할 시설들이 많았다. 11월 27일에도 우리는 시찰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멀리서 들려오는 대포소리가 점점 잦아지는 듯했다. 부전고지까지 올라온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전투에 말려들 우려가 있었다.

▲ 6.25전쟁 당시 안동혁 박사와 함께 방문한 원산정유공장 / 폭격으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군용 트럭을 빌려 육로로 평양을 거쳐 서울로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연포비행장으로 가서 미군 비행기를 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육로로 트럭을 타고 가자면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논 끝에 의견을 모아 비행장으로 갔다. 미군 지휘관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며 병기행정본부가 우리에게 빨리 오라는 지령을 보냈는데 교통 편이 급하니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했다. 지휘관은 마침 대기 중인 비행기가 한 대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안동혁 선생이 다시 의견을 내셨다. 우리가 어려운 길을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 함흥으로 되돌아가 공장 자료를 가지고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일 비행기가 있으면 태워달라고 부탁을 해놓고 다시 트럭 편으로 함흥으로 되돌아 갔다. 그곳에 있던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대로 부랴사랴 긁어모은 우리는 여관으로 가서 초조하게 그날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새벽에 우리는 서둘러 비행장으로 달려갔으나 비행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된 이상 어디로 갈수도 없으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저녁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날이 저물어갈 무렵 비행기 한 대가 들어왔다. 동경으로 가는 비행기라는 것이었다. 오늘 안으로 꼭 서울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 수 없느냐고 기장에게 사정을 했더니 그는 가는 길에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선선히 응낙해 주었다.

비행기는 포탄에 맞아 문짝이 달아나고 없었다. 그러나 급해 맞은 마당에 그런 것을 개의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감지덕지 비행기에 합승하여 1시간 후 여의도 비행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한 최후의 탈출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떠난 직후 유엔군이 후퇴했고, 함흥은 공산군에게 다시 점령당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