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이 후퇴하여 전황이 위태로워졌을 때 나는 내 집 식구와 처가 식구들을 12월 8일에 서둘러 부산에 내려 보낸 상태였다. 예상대로 서울은 1월 4일 다시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 중공이 전투에 가담하여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탓이었다. 남한 주민 대부분이 대구 이남 각지로 후퇴했고, 정부와 주요 대학들도 모두 부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함흥에서 돌아와 이미 부산으로 자리를 옮긴 아내와 합류한 나는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8월 1일에 가졌던 결혼식은 비공개적인 것이었기에 이번에는 피로식(披露式)인 셈이었다. 12월 28일에 우리는 광복동 어느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산에 내려간 뒤 나는 병기행정본부의 위촉을 받아, 서면에 천지공작소라는 소총공장을 세웠다. 김도준 씨가 사장, 내가 부사장, 김재근 씨가 공장장이었다. 총 제작 기술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총구멍을 똑바로 뚫고 그 안에 나선을 넣어 총알이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나갈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1951년 3월에 나는 정부로부터 총기제작 기술을 도입하고 기계를 구입하기 위하여 일본에 다녀오라는 위촉을 받았다. 병기행정본부의 고문의 자격이 내게 주어졌다. 총알에 사용되는 면화약(綿火藥)을 사는 것도 사명 중의 하나였다. 이런 일로 그 후 나는 일본에 자주 가게 되었다.
정부가 총기제작 기술의 필요를 절감하게 된 데에는 웃지 못 할 사연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해군 공작창에서 총을 만들어 비단보에 곱게 싸가지고 대통령께 진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 앞에서 시험발사를 하자 총알이 나가지를 않았던 것이다. 총의 격침(擊針)에는 타하트(Tahartㆍ일본에서 제작된 특수강(鋼)이 들어간 강도 높은 합금을 사용해야 하는데 보통 철을 썼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었다.
일본에 가기 위해 받은 여권은 학교 졸업장 같이 생긴 종이 한 장이었다. 이름, 생년월일, 본적지, 소속 등 필요한 사항이 큼직한 문자로 적힌 여권에는 75라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건국 후 75번째로 발행된 여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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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년 병기행정본부장 이종찬장군과 함께 / 병기행정본부의 위촉에 따라 민간인 고문자격으로 소총화기의 국내생산을 위한 기술도입 및 자재구입을 위해 수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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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공작소에서 총이 제작되기 시작하자 나는 대통령 앞에서 시험사격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총대를 오른쪽 어깨 위에 놓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무사히 발사되어 천지공작소의 면목은 섰으나 나는 방사 때 발생하는 엄청난 총소리를 미처 예측하지 못하여 그대로 쏘았기 때문에 그 순간 오른쪽 귀의 청신경이 손상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청각을 잃게 된 내 오른쪽 귀는 명예의 훈장인 셈이다.
1951년에서 1958년까지 나는 북삼화학 주식회사의 상무이사 직을 맡고 있었다. 북삼화학은 카바이드를 만드는 국영 기업체였다. 전에 카바이드로 빙초산을 만드는 공장을 세웠던 이력 때문에 상공부가 나에게 맡긴 일이었다. 총기 일로 일본에 간 것은 북삼화학 이사로 있을 때와 시기적으로 중복된다.
기술조사는 동경대학의 생산기술연구소의 다카하시 다케오[高橋武雄]교수의 주선으로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제강점기 경성제대(京城帝大) 응용화학과 교수로 있다가 전쟁 후 동경제대 교수가 되었다. 나는 전쟁 중에 한 때 경성제대 응용화학과 조수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경성제대에는 다카하시 교수 외에 사이토 노부후사, 후지호카 다다히토, 무카이 산노쥬, 이시바시 코키, 무라카미 켄이치 교수와 같은 쟁쟁한 학자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나를 동경제대연구소에 소개해 준 이는 사이토 교수였다. 그는 종전 후 귀국하여 동경대학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연의 진기함을 실감시키는 재회였다.
나는 이 기회에 다카하시 연구소에 적을 두고 중단되었던 연구를 계속했다. 나의 연구 내용은 종합과학연구소 시절 관찰하였고 서울대학교 석사과정에서 연구하였던 볏짚의 촉매작용에 대한 흥미의 연장이었다. 그 연구의 내용은 규산을 비교적 풍부하게 함유하는 볏짚, 밀짚, 대나무 잎, 갈대 증의 식물에서 유기성분을 제거한 무기물의 스켈리톤(skeleton)을 촉매 또는 흡착제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때 생성된 물질을 기타의 합성법에 의해 생성된 것보다 활성이 강하고 그 합착 면적이 비교적 넓다. 석유화학 산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이 일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댜카하시 교수는 대학 동기동창인 모토요시 씨도 소개해주었다. 오시마 씨는 2차 대전 이전에 조선질소주식회사의 소옥탄 본궁(本宮) 공장의 과장으로 있다가 노구치[野口]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북 정부에 의해 북조선인민공장의 기술고문으로 억류되어 수년 동안 공장 조업을 도운 일이 있었다. 나는 흥남에서 가져온 문서 중에서 그와 관련이 있던 이소옥반 공장에 관한 기록사본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후일 그는 그 기록을 근거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그런 인연으로 알게 된 오사마 씨는 지요다화공건설주식회사(千代田化工建設株式會社)의 다마키 아키요시[玉直明善] 사장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나의 석유화학공업 육성의 꿈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을 준 분들이다.
일본에 있는 동안 나는 또한 포스터 휠러(Forster Wheleer)의 월리엄 설리반(William A. Sullivan) 씨와 웨스트(G. P. West) 씨,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커틴(Enos Curtin) 씨, 에틸(Ethyl) 코퍼레이션의 카터(C. D. Cater) 씨, AMOCO의 마이어(Meyer) 씨와 같은 굵직한 인물들도 알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석유산업이 발전되어 있었으며, 1930년대에 석유화학 제품인 나일론을 이미 생산했고, 플라스틱 제조기술을 이미 개발했으며, 1945년 경에는 폴리에틸렌 생산기술을 개발하였다.
일본은 1925년경부터 정유시설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은 2차 대전 중에 거의 폭격을 당하여 파괴되었다. 물론 정유시설은 전후에 복구되었으나 일본에서 석유파생상품을 생산하는 석유화학 산업이 시작된 것은 1955년경의 일이다. 나로서는 이론적으로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석유화학의 구체적 실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놀라운 것은 각기 기술계의 거물로 있던 그들이 무명의 젊은 한국인인 나의 황당하다면 황당한 나의 석유의 꿈에 귀를 기울여준 일이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필요하면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설리반, 카터 씨와 한국의 공업화를 위한 구체적 방법에 대핸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리만 씨는 해군소장을 지낸 사람인데 군인답게 당당한 체격과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틴 씨는 서양인 치고는 키가 자그마한 미남형 신사였다. 두 사람은 한국이 정유산업을 한다면 미국의 원조를 직접 받기는 어렵겠으나 자금조달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일에 도전해볼 용기와 실마리를 주는 일들이었다. 그때까지 전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정유공업, 석유화학공업이 가능한 일로 눈앞에 다거서는 희망을 안겨주는 일들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정유산업이 구체적인 형체를 갖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