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아내는 이화여대 영문과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이화여대는 부산에 피난 오면서 부민동 언덕에 나무 판자로 가교사를 지어 수업을 하고 있었다. 다른 대학들은 부산, 대구, 광주, 전주에 가설된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는 국제 감각이 뛰어나고 시야가 넓은 활동가여서 피난살이에서도 필승각(必勝閣)이라는 2층 건물을 사들여 당신의 숙소로 이용하는 동시에 학교 행정처, 교수 회의장, 외교사절들과의 사교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김활란 박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승각에 교직원들도 자주 초대하였다.
우리가 약혼했을 당시 아내가 이화여대 추천으로 하버드 옌칭 스칼라십을 받아 유학을 가기로 되어 있었던 관계로 나는 김활란 박사에게 약혼 허락을 청하러 간 일이 있었다. 김활란 박사는 이화여대의 교직자 중에 기혼자가 매우 드물지만 남의 결혼을 가로막을 수야 있겠느냐며 허락을 해주었다. 나는 약혼한 상태로 아내를 미국으로 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아내의 미국유학은 일단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 결혼이 앞당겨진 것이었다.
그런 관계로 나는 아내와 함께 김활란 박사를 이따금 찾아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이 장차 살아가려면 정유공업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김활란 박사는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 주었다. 김활란 박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대통령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처음 이 대통령을 만난 것은 1951년 초 부산 도청 뒤에 있었던 임시 대통령 관저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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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나영균의 이화여대 석사졸업식장에서 / 왼쪽부터 장모님, 나영균, 장인어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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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6.25에 의해 파괴된 경제를 살리는 길은 한국의 공업화뿐이며, 공업화를 위해서는 에너지원인 석유를 만드는 정유공업과 석유화학공업을 꼭 추진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대통령의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었으나 전쟁 중인데다 석유에 관한 한미협정 및 자금관계 등 어려운 문제가 많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 후에도 이 대통령을 수차례 만나 한국의 공업발전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통령 내외의 생활은 지극히 검소하고 소탈한 것이었다. 한번은 프란체스카(Francesca)여사도 합석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시간이 되었다. 대통령이 점심이나 하고 가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프란체스카 여사가 중국식당에서 주는 꽃빵과 간장을 손수 들고 들어와서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석유사정은 해방 후 미군청정이 제정한 제도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해방 후 미군청정은 석유제품의 수입 배급을 위해 석유배급대행회사(Petroleum Distribution Agency)를 설립하여 국내 모든 석유 수급을 이 기구가 취급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오던 조선석유도 미군청정의 관리를 받게 되었으며 1949년 석유류의 저장 판매 업무를 대행하는 KOSSO가 설립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스탠더드, 칼텍스, 쉘의 판매회사는 철수하고 코스코가 석유류 일체의 판매를 직접 행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석유수급 업무의 키는 코스코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난색은 이러한 사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무렵 이 대통령은 내게 하나의 제안을 했다. 미국의 셀라니즈(Celanese)회사가 아세테이드 레이온 공장을 세우려는데, 그들과 함께 공장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50만 달러의 자금을 대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돈벌이를 위해선 솔깃한 이야기긴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한국에 맞는 공업이 아니었다. 아세테이드 레이온을 만들자면 원료로 부드러운 조면(繰綿)을 써야 하고 무수초산(無水醋酸)을 섞어 아세테이드화 시켜 방사(紡絲)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원료도 없거니와 그렇게 생산되는 고급 인견은 한국 대중이 의복 재료로 쓰기에 적절치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의견이었다. 차라리 광목이나 면직물이라면 실용성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이 대통령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대통령이 “달라는 놈 천지인데, 50만 달러짜리 원조를 연결해주겠다는데, 안 받겠다고 하는,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웃더라고 한다. 이 대통령은 이런 나를 상당히 총애하는 편이었다.
6.25 전쟁은 3년 간의 전투가 이어진 끝에 휴전협정에 이르게 되었다. 1952년 6월 22일 이북은 유엔주재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Yakov Alexandrovich Malik)를 통해 정전을 제의해왔다. 미국은 이를 받아 김일성과 중국의 펑더화이(彭德懷)에게 회담할 것을 제의하여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우어((Dwight Eisenhower)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빠른 종전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종전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가 있었다.
이승만 정부와 국민들은 이 기회에 통일하자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반대했으나 그 외의 당사자들은 휴전에 이의가 없었다. 다만 경계선을 어디다 긋느냐에 대해 의견이 대립되었다. 미국은 38선을 넘어 진격한 곳을 경계선으로 하자고 하고 북 측은 원래 38선이 있던 대로 하자고 고집했다. 회담은 중단되었고 그와 동시에 각지에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국 이북이 굴복하고 경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 측의 요구에 승복하기로 하고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설치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포로 송환 문제가 다시 난제로 대두되었다. 유엔군 측은 북한국 포로 중에는 남한 점령지구에서 강제로 징집당해 일선에 보내진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또 중공군 포로 중에는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상당 수 있는 것을 감안하여 송환은 각자 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 측에서는 이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1952년 12월 3일 제 7차 유엔총회에서 포로송환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송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포로들은 120일 간의 유예기간 후에 각자 희망대로 송환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3월 28일 북한은 드디어 휴전회담 재개를 제의해왔고, 4월 11일 포로교환 협정이 성립되었다.
양 측은 155마일에 이르는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양 방향으로 2km에 이르는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기로 하고 1953년 7월 27일에 유엔군 측과 북한군 측이 협정에 서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