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초여름 우리는 2년 반의 피난살이를 접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은 큼직한 빌딩은 모두 파괴되고 거리에는 벽돌과 돌조각만 쌓여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동대문까지 훤히 보였다.
혜화동 우리 집은 워낙이 높은 계단 위에 있어 무사했고, 처갓집도 남아 있었으나 두고 간 가구나 물건들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룻바닥은 흙발로 걸어다진 자국이 완영했다. 장인의 아버지께서 추사(秋史) 본인에게 직접 써 받으셨다는 병풍, 그 유명한 대원군 난초도 온데 간데 없었다.
환도하고 얼마 있다 이 대통령께서 석유사업을 추진해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 대통령은 내가 부산 시절 건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밴 폴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에게 편지하여 석유사업의 전망에 관한 가능성을 타진해 본 후에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통령께서는 외국 회사들에게 우리 계획을 알려야 하니 영문으로 계획안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 조선석유를 재건하여 정유공장을 만들어 본격적인 정유산업을 발전시키려는 계획안이었다. 이때 만든 것이 <울산 정유공장 계획(Project of Ulsan Oil Refinery)>과 울산 정유공장에 대한 기초공정 조사보고서이다.
이 계획서는 일본이 1945년 이전에 정지작업을 해놓고 원유저장시설을 만들어 놓은 울산의 공장부지에 연간 40만㎘(하루 7600배럴)의 정유능력을 가진 공장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 공장이 서게 되면 다른 나라에 정유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되어, 연간 925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고 파라핀 왁스, 바셀린, 아스팔트와 같은 정유의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
필요한 투자액은 905만 6,400달러의 공장설비 비용과 토목 및 건축비로 한화 5억 7,600만원이었다. 한화는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필요한 외화는 한국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하는 차관으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 와서 보면 부족한 점이 많으나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역사적 문헌이 될 수 있는 계획서라 하겠다.
이 대통령은 이 사전보고서를 미국의 여러 회사에 보냈다. 대통령도 정유공장을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은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편지를 받고 밴 폴리트 장군이 참여할 회사를 찾는 일을 돕겠다고 제의해왔다.
벤 폴리트 장군은 6.25 전쟁 때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의 뒤를 이어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노련한 작전으로 도처에서 중공군을 격퇴하고 그들에게 박대한 손실을 입히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2차 대전 때도 발지(Bulge)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활약하여 그 공로가 인정된 전쟁 영웅이었다. 이런 관계로 이 대통령의 그에 대한 사랑은 매우 두터웠다.
1953년 정부차원의 울산 공장 복구계획이 세워지고, 1954년 안동혁 선생이 상공장관에 취임하면서 계획은 다소 진전을 보였다. 그 해 내게 조선석유회사 관리인 임명장이 주어졌다. 내가 관리인이 되는 데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선석유는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사장이나 이사를 임명할 때 주주총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부는 주주총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관리인이라는 직책을 내게 준 것이다. 월급 한 푼 안 나오고 사무실도 직장도 없이 책임만 중한 자리였다. 그래도 내게는 석유사업과 관련이 있는 이 직위가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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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말 원로석학이신 안동혁 박사 및 이태규 박사를 모시고 경주 일원을 안내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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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말 나는 정유산업을 위한 본격적인 계획서를 작성했다. 1차적으로 하루 3.000배럴을 처리할 수 있는 기존의 상업증류 장치를 4,500배럴로 늘리고 부대시설도 확장 조업하는 계획서였다. 그 계획은 외화 71만 5000달러와 내자 21만 5000달러, 도합 93만 달러를 투자하여 1차 공사를 완성시키고, 다음으로 2차적으로 5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일간 8,000배럴을 생산할 수 있는 상압증유 장치와 2,000배럴의 접촉개질 장치를 시설하고 부대시설도 확충하자는 것이었다.
같은 해에 나는 을지로 입구에 사무실을 얻어 전엔지니어링 회사를 설립했다. 엔지니어링 회사란 공장을 설계하는 회사이다. 한국에서 엔지니어링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내가 대한석유공사를 그만 둔 후, 1971년 전엔지니어링 회사를 다시 설립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본격적인 엔지니어링 산업이 발달하기 20여 년 전에 나는 이미 엔지니어링 산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 회사에 성정자, 문인일(文麟一), 이선종(李善鐘), 윤진만(尹振萬) 씨 등 젊은 엔지니어들이 사원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5.16 이후 대한석유공사가 설립되어 내가 이사직을 맡게 되었을 때 같이 이동하였다. 내가 그만둘 때 같이 그만두고서 전엔지니어링을 다시 설립하는 주축이 되었던 멤버들로서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일념으로 나와 뜻을 같이 했던 소중한 동지들이다.
그 중에서 유일한 여성인 성정자 씨는 경기여고를 수석으로 나오고 서울대 공대를 들어간 최초의 여학생이었다. 당시 여학생이 공대에 간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도 못하던 일이었다.
성정자 씨는 6.25전쟁 발발 당시 최종완(崔鐘浣) 씨와 결혼하여 부산으로 피난 간 후 대성양조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일단락되어 모두 서울로 돌아오자 우리 회사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엔지니어인 그는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일에 대한 열의와 성의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대단했다. 그는 우리 회사에 입사한 뒤 석유공사, 전엔지니어링을 거쳐 1983년 10월 암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나와 함께 일해 준 고마운 동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