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에서 (2회)

진학을 통하여 과학의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나는 1942년 20세 때 독학으로 습득한 화공학(化工學) 지식을 바탕으로 뚝섬에 연구소를 개설했다. 연구소는 조그마한 것이었으나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장차 우리나라 과학의 총본산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에서 이름도 거창하게 <종합과학연구소>라고 지었다.

이것은 20세 청년의 과학에 대한 꿈의 결실이었다. 당시 뚝섬이라면 동대문역에서 기동차(汽動車)를 타고 가야하는 곳이었다. 뚝섬은 한강과 넓은 풀밭이 유원지를 조성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주말이면 소풍삼아 찾아오는 곳이었다.

연구소는 뚝섬 동쪽 제방 아래 위치한 단층 창고였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방이 두 개이던 것을 나중에 방 하나를 증축하여 사용했다. 총 인원은 나까지 합해서 6명이었는데, 구성원의 질은 만만치 않았다

2차대전 말 용산에는 일본 육군 군수품 창고가 있었다. 현재 USIS(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건너편 쯤 되는 곳이었다. 거기에 수납된 대량의 군복을 국방색으로 염색하기 위해서는 빙초산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의 삼정(三正)이라는 회사가 빙초산 공장을 세우기 위해 우리 연구소에 설계도를 의뢰해왔다. 그것은 참나무 숯을 구워 거기서 나오는 목초액(木草液)을 가지고 빙초산을 만드는 공정인데, 메이지[明治]시대부터 알려진 공법이었다.

고바야시[小林]광업이라는 회사가 이 사업에 관심을 갖고 삼정과 합작으로 공장 설립을 위해 가평에 땅을 사고 100만원을 투자했다 나는 가평의 여관방을 얻어 그곳에서 묵어가면서 공장의 설계도를 만들고 공장 기술도 제공하여, 열심히 일했으나 완공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 공사가 중단되었다. 나와 빙초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일찌감치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뚝섬 연구소를 집에서 너무 멀었다. 전차와 기동차를 갈아타며 오고가자니 시간이 너무 걸렸다. 그래서 나는 연구소를 장사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장사동 연구실은 청계천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이 무렵에는 연구원들도 수가 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중에 전황이 다급해지자 일본은 대학의 문과계열 학생들을 징병으로 징집해 전쟁터에 내보냈으나 과학계만은 보류시키고 있었다. 아마 총받이 보다는 그들의 두뇌가 쓸모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전황이 결정적으로 불리해지자 1944년부터는 과학계도 모두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일본에 남아있던 이공계 유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속속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연구소에도 그러한 이들이 여러 명 들어와 있었다. 이재성(李載聖) 씨는 동경제대(東京帝大) 응용화학과 3학년, 김석균 씨는 동경제대 약학과 3학년, 이인준 씨는 경도제대 광학과 2학년이었다. 사설 연구소 치고는 최고의 인원을 갖춘 셈이었다. 나는 이 유능한 브레인들에게 직장을 제공하고 함께 일하는 데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 일제에 강제 징병된 조선청년들이 남양군도로 이동 중 덕수궁 인근에서 가족과 상봉하고 있다

어느 날 내가 책상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일본 장교 두 사람이 관수교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우리 연구소에 오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 현관으로 곧장 들어서는 것이었다. 나 자신과 직원들이 징용장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던 차에 드디어 나를 잡으러 왔구나 싶어 겁이 더럭 났다.

당시 일본은 중국 하나만 상대해도 벅찬 터에 세계 최강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확대시켜 무력, 인력, 금력, 물력의 절대 부족으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무기를 만들 금속이 부족해서 백성들은 은수저, 놋그릇, 대야, 밥솥, 냄비, 요강, 아낙의 비녀까지도 금속으로 된 것이면 무엇이건 헌납해야 했다. 총독부의 담을 이루던 철책도 뜯어가던 판이었다.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날마다 가미가제[神風] 특공대가 10여대씩 미국의 항공모함을 향해 돌격 자폭하는데, 그들에게는 편도에 쓰일 연료만이 공급되었다. 어차피 자폭해서 죽을 터이니 돌아오는 연료는 필요 없었겠으나, 그보다도 주고 싶어도 줄만큼의 연료가 없었던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10대의 가미가제기가 출격하면 그 중 8~9대는 비행기가 원래 일회용으로 불완전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표물인 미 항공모함에 가기도 전에 바다에 추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폭에 성공하는 것은 하나 아니면 두 대에 불과했다. 어이없는 인명의 낭비라고 할 수 있으나 일본 군부는 그래도 미국을 떨게 하는 효과가 크다며 이 작전을 끝까지 계속했다.

그들은 바닥이 난 휘발유의 대체물로 알코올을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육군연료본부에서는 한반도와 일본에 있는 소주와 맥주공정을 일제히 알코올 공장으로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동시에 설계도를 배포했다. 당시 함경도에서 차부(車部. 지금의 터미널)를 운영하며 버스와 택시를 여러 대 굴리고 있었던 방의석(方義錫) 씨는 함경도의 ‘자동차왕’ 이라고 불렸다. 이 방의석 씨가 경영하던 북청 소주공장의 책임자는 이러한 변경 명령을 받고는 일본이 배포한 설계도거 미흡하다고 생각했던지 내게 설계도를 부탁했다.

당시 나는 함경도 신상에 있는 양조장을 설계해주었는데, 그 사람을 알고 있던 방의석 씨가 나의 일 솜씨를 보고 나에게 설계도를 의뢰해온 것이다. 일금 5,000원을 받고 내가 만든 가지고 이 공장 책임자는 육군연료본부를 찾아가 이 설계도를 사용하고 있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당시 하급관리나 보통학교 선생님의 월급이 40원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5,000원이란 금액은 오늘날 가치로는 억대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날 나를 놀라게 하며 니시야먀[西山忠夫] 대위와 사쿠라이 소위가 나를 찾아온 것은 이 설계도를 보고 사용권을 팔아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군부에 협력하는 일이기에 망설여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미 그들의 손에 들어간 설계도이니 거절하는 것은 무의미한 갈등을 빚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와 직원들은 그 무서운 징병과 징용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20세의 무명 청년이 세운 연구소에 이런 일이 맡겨진 것을 보면 당시 한국의 공업기술 수준이 얼마나 초보 단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연구소를 운영하는 한편 나는 당시 경성제대(京城帝大. 지금의 서울대) 화학과 교수들의 조수노릇을 겸하여 학계와의 인연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정식과정을 통하여 이룰 수 없었던 학문에의 꿈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길이기도 했다.